Safe Space (13)
Published on March 4, 2026 by acorn_field
[The Gorge] Levi x [Oblivion] Jack :: 텟이 침공하지 않은 세계의 잭이 협곡에 가지 않은 리바이와 만나는 이야기
텔톰 필모 크오
[The Gorge] Levi x [Oblivion] Jack
Memories of warmth
Becomes the storms
Stirs the settled dust
Of a broken heart…
온기의 기억은
폭풍우가 되어
부서진 마음의
먼지를 흔들고…
맑은 저녁의 시끌벅적한 인기척은 수송 트럭이 주차된 창고 건물 뒤까지는 닿지 않았다. 트럭 위에 올라 앉은 리바이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몇분간 정성껏 써 내려가던 시 구절을 두어번 더 읽었다. 보면 볼수록 제 못난 속내만 드러내는 게 훤히 보이기에 결국 그 위로 또 다시 못난 선들을 죽죽 그었다. 쓰지 않은 종이가 얼마 남지 않은 두툼한 공책을 신경질적으로 닫아 제 옆에 내려놓은 그는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담배 연기를 폐 바닥까지 꾹꾹 밀어 넣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저녁 하늘은 평화로운 붉은 빛으로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었다.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몽글몽글 피어오른 호숫가에서의 기억은 무해한 듯 굴며 너덜너덜한 심장을 보듬어주다가도 여느 때처럼 날을 세워 더 깊은 상처만 남기고 지나갔다. 짙은 담배 연기와 함께 뱉어낸 무거운 한숨에도 불구하고 가슴팍을 짓누르는 우울함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끝 없는 사막 한 가운데로 보내진 지 어느새 석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만한 유명 민간 군사 기업에서 정기적인 물자 수송을 호위하는 일을 맡겼기에 당연히 군수 물자겠거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분쟁 지역에 의약품과 식수를 제공하는 종교 단체를 호위하는 일이었다. 회사가 창립 되었던 해부터 그들을 위해 용병 호위팀을 고용해주는 게 연례행사 비슷한 일이라는 애사심 가득한 자랑도 뒤따랐다. 다크레이크의 인도주의적 사명을 위해 돈을 받고 재주를 부리는 건 인간성이 사막만큼 메마른 용병들이었지만.
작전국장이 예고한 것처럼 작전이 시작된 직후에는 물자를 노리는 무리가 하루가 멀다하고 들이닥쳤다. 이번 용병들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달으면 남은 기간은 대체로 평화로울 거라 했으니, 아마 남은 석 달은 지난 일주일과 비슷한 정도로 느리게 지나갈 터였다.
자신을 비롯한 다른 용병들도 벌써 무료해 하는 게 눈에 보였으나, 하는 일에 비하면 회사 이름에 걸맞게 계약금은 나름 두툼하게 챙겨줬기에 딱히 불만을 가지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느슨해지는 생존 본능 사이로 스며드는 잭에 대한 그리움과 평생 이뤄지지 않을 인연을 향한 갈망은 끊임없이 리바이의 심장을 갉아 먹었기에, 종일 긴장해 있다가 엉성하게 조직된 약탈자들을 처리하고 안전이 확보된 순간 곯아떨어지듯 잠이 들던 처음 몇 달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평화로운 저녁의 붉은 빛이 온 세상을 물들일 때면 호숫가의 노을이 옮은 잭의 상기된 뺨이 눈앞을 일렁였다. 말끔하게 면도를 한 아침엔 그저 보드랍기만 하던 그의 뺨을 저녁 즈음에 쓰다듬으면 제 손바닥을 살살 간지럽히던 수염의 감각은 여전히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짧아진 담배를 깊게 들이 마시던 리바이는 의도치 않게 손끝으로 제 메마른 입술을 쓸었다. 그 거친 마찰에도 잭의 턱선에 입을 맞췄던 순간이 제멋대로 떠올라 목덜미로 전율이 올랐다. 낮은 신음을 흘리며 자연스레 목을 내어준 그는 제 목덜미에 손을 감아 은근히 당겨 내렸었다. 몸을 조금 더 바짝 붙이며 그의 엉덩이와 등허리를 잡으면 몸에 긴장을 푼 그는 귓바퀴에 입을 맞추며 제 이름을 속삭이고…
담배 연기가 뒤섞인 욕을 짓이긴 리바이는 축축해진 눈두덩이를 꾹꾹 주물렀다.
심장 깊은 곳에 꽂힌 그와 함께한 아름다운 순간의 기억은 가시 돋은 장미처럼 지나가는 자리마다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헤집었으나, 제 인생에 유일하게 빛나는 추억들을 제 품에서 떼어 놓는 방법을 몰랐다. 시간이 지나도 영 익숙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답답한 고통은 제 무덤까지 따라올게 뻔했다. 천근만근 무겁기만 한 우울한 무력감은 언제나 리바이의 심장을 어두운 심연으로 끝없이 끌어 내렸다. 차라리 글로 써서 뱉어내면 속이라도 후련할 줄 알았는데, 단순한 글자 따위로는 표현하기 힘든 끈적하고 음울한 감정만 목구멍까지 울컥 차올라 혀뿌리에 들러붙을 뿐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자꾸만 기어오르는 끈적한 욕망과 평생 채워지지 않을 공허한 마음마저 전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담배꽁초를 트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힘껏 던진 리바이는 깊은 한숨을 뱉어내며 그대로 드러누워 붉은 하늘을 응시했다.
잭은 여전히 휴스턴 나사 기지 근처에서 지내고 있을까, 아니면 맨해튼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돌아갔을까. 나사 프로젝트가 몇 년 뒤로 계획되어 있으니, 할 일이 많아 바쁘겠지. 전문가들 예상대로 이번에도 그 사람이 사령관으로 지명될 테니까. 잠은 제대로 자려나. 밥은 제대로 먹고 있을까. 지나치게 몸을 혹사하지는 않았으면 좋을 텐데…
마지막으로 잭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던 건 한 달 전이었다. 매일같이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어쩌면 그도 자신을 조금이라도 그리워 할지 모른다는 자그마한 희망을 꺾은 것도,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사진 하나 제대로 보기 힘든 느린 인터넷으로 두어번 그의 이름을 찾아보고 알게 된 건 잭이 길거리 목격담만으로도 화제가 되는 유명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한 같잖은 자격지심과 질투심을 자극하는 기사와 선동을 통해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려는 이들의 탐욕이 얼마나 끔찍한지 까지도. 잭의 오두막에 대한 정보가 대중에게 공개 된 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할 수 있었으나, 동시에 그곳이 매물로 올라온 걸 알게 된 이후로 다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보는 일은 없었다.
부동산 사이트에서 그와의 추억이 남은 장소들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찬찬히 응시하며 평생 그를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심장이 찢어지게 고통스러웠으나, 그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아니,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제 와 자신이 충격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잭의 기억 속에서 호숫가의 오두막과 리바이 케인이라는 존재는 그의 연한 살을 끊임없이 파고들어 간을 파먹고 상처를 남기는 까마귀 떼의 일부일 테니까. 언젠가 잭이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잭 하퍼. 세상 모든 이들의 관심과 동경을 받는, 인류의 우주 개척을 이끄는 선구자이자 구원자.
미래 나사 우주 탐사를 이끌 사령관으로 가장 유력한 우주비행사.
당장 길거리 한복판에서 참수를 당해도 슬퍼해 줄 이 한 명 없는 자신과는 사는 세상부터가 다른 그가 저따위의 인간에게 눈길조차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두 번째로 그에게 총구를 겨눴던 순간 제 음침한 마음을 가차 없이 잘라 내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의 소식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잭은 그가 속하는 곳에서 언제나처럼 빛을 발하며 세상을 밝게 비출 테니까. 그에게는 끔찍한 불행의 상처일 뿐인 자신과의 기억 따위는 이미 한참 전에 없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음울한 감정이 또 다시 스멀스멀 몸집을 키웠다.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흘린 리바이는 피로한 눈꺼풀을 주무르며 애써 다른 생각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 How much? One thousand?” (… 얼마나 있다구요? 천?)
누군가의 조용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 눈을 뜬 리바이는 그대로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검붉은 하늘은 미약하게 어둑한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길어봐야 몇 분 쯤 선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Yes, the medicine boxes marked with a red square stamp on top. The team will be here past midnight from the south. Send your team to the north and east for nightly patrol and be sure to keep this area clean.” (그래, 빨간 네모 도장이 위에 찍힌 의약품 상자들이야. 자정이 지나서 남쪽에서 팀이 올거다. 네 팀원들은 북쪽이랑 동쪽으로 야간 순찰 보내고, 이 근처엔 아무도 못 오게 해.)
“Yes, sir.”
트럭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작전국장과 팀장이 틀림없었다.
들어선 안될 대화를 의도치 않게 엿들었다는 자각과 함께 목덜미로 불안한 기운이 올랐다.
“Good. I’ll be back by tomorrow evening. Don’t mess up.” (좋아. 내일 저녁까지는 돌아오도록 하지. 망치지 말라고.)
“Yes, sir.”
그들의 발걸음이 창고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트럭 위에서 한참 굳어 있던 리바이는 주위가 완전히 조용해지고 나서야 제 공책을 집어 들고 재빠르게 땅으로 내려왔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이번 작전이 단순히 물자와 수녀들을 호위하는 인도주의적인 일은 아닌 게 분명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과 죽음에 뿌리를 둔 다크레이크가 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 같은 이들에게 돈을 쓸 리가 없지 않은가. 신념이 다른 자들을 반기지 않는 메마른 땅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는 자매들 지키며 아주 조그마하게나마 제 존재의 희망을 품었던 자신이 멍청한 것 뿐이었다.
몇 주 전, 총탄이 조금 스친 상처를 정성껏 돌봐주며 자신들을 지켜주어 고맙다던 젊은 수녀의 맑은 녹색 눈동자가 머릿속을 일렁였다. 이제 와 달라질 건 없었다. 혀뿌리에 눌어 붙은 쓴맛을 애써 삼킨 리바이는 어둑하게 주위를 확인하며 재빠르게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자리가 뒤숭숭해 이리저리 뒤척이던 리바이는 자정이 조금 넘긴 시간을 확인하고 조용히 간이침대에서 내려왔다. 지난 며칠간 아무런 사건도 없이 지나치게 조용했던 탓에 작전부장과 팀장이 나눈 은밀한 대화에 관한 궁금증이 뒤통수를 긁어댄 탓이었다.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들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다크레이크가 무슨 더러운 일에 손을 대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도 아주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달빛만 은은하게 비치는 건물 내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숨소리를 죽이며 창고가 보이는 창문 옆에 선 리바이는 조심스럽게 커튼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어둑한 등불만 두어개 켜진 건물 앞에 처음 보는 수송 트럭이 열린 문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었다. 어두운 옷을 입은 이들 중 몇몇은 창고에서 상자를 꺼내 트럭 짐칸에 싣고, 다른 이들은 똑같이 생긴 상자를 트럭에서 꺼내 건물 밖에 쌓고 있었다. 서류 봉투를 든 팀장은 창고의 열린 문 근처에 선 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기 밀매인가. 공식적인 루트로 무기를 파는 걸로는 성에 안 찼나 보군. 챙겨가는 만큼 의약품도 제대로 채워 넣고 있으니,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속으로 혀를 찬 리바이가 침대로 돌아가기 위해 이동하려던 순간, 건물 벽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어둑한 등불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어색하게 숨은 그 작은 그림자의 어깨가 작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익숙한 옆모습에서 몇 시간 전 반갑게 저녁 인사를 나눴던 젊은 수녀의 모습이 겹쳤다.
리바이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거렸다.
다크레이크라면 이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수녀 한 명 조용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터였다. 그가 제 옆에 있었다면 목숨이 위험하니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입단속을 시킬 수야 있겠으나, 만약 지금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당장이라도 그가 자리를 뜨길 바라는 리바이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수녀는 다리를 달달 떨면서도 조금 더 가까이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문서에 무언가 써 내려가던 팀장이 무슨 소리라도 들은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속으로 욕을 짓이긴 리바이는 재빠르게 건물의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What the fuck are you doing here?” (여기서 씨발 뭐 하냐?)
창고 건물 외벽에 기대 선 리바이를 발견한 팀장이 위협적으로 미간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에 긴장하며 날을 잔뜩 세운 게 마주한 시선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Good evening to you too, Chief. Director said he could use another eye to keep people out.” (그쪽도 좋은 저녁입니다, 치프. 국장님이 사람들 오는지 감시하는데 사람 한 명 더 쓰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죠.)
별다른 동요 없이 태연하게 미소를 지은 리바이가 작전국장의 이름을 들먹이자 팀장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고개를 기울이며 팔짱을 낀 그의 의심스러운 눈길이 리바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He didn’t mention that to me.”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Does he need to?” (그분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냉소와 함께 헛웃음을 터뜨린 리바이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평소 작전국장 특유의 남을 깔보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 게 제대로 먹혀든 듯, 그저 짜증 가득한 한숨을 흘린 팀장은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주물렀다.
“Whatever. The job is done. Go back to your quarters.” (알게 뭐람. 일은 끝났어. 네 방으로 돌아가.)
“I will, after a smoke.” (한 대만 피고 들어가겠습니다.)
능청스럽게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든 리바이를 잠시 말 없이 노려보던 팀장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창고 입구로 향했다. 그가 건물을 돌아 완전히 사라진 순간 리바이는 자신의 뒤로 꺾인 건물 벽에 주저앉은 채 숨어 있던 젊은 수녀의 팔을 틀어 잡았다.
“Move. We gotta go.” (움직이십쇼. 가야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낮게 속삭인 리바이는 그를 질질 끌어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수녀들이 머무는 건물까지 안전하게 그를 데려온 리바이는 그제야 제 손에 잡힌 그 작은 몸이 불쌍하게 덜덜 떨리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Sister. Hey, Sam, look at me.” (자매님. 이봐요, 샘, 날 봐요.)
작은 어깨를 단단히 잡고 조용하게 속삭이자 축축하게 젖어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What… What was that? What were they…” (무슨… 그게 뭐였죠? 그 사람들이 뭘…)
“Shh. Stop. You never left your bed tonight. Do you understand?” (쉿. 그만. 당신은 오늘 침대를 떠난 적이 없는 겁니다. 이해 해요?)
“But they…” (그렇지만 저 사람들이…)
“Samantha. Listen to me.” (사만다. 잘 들어요.)
약한 공황이 온 듯 급한 숨을 헐떡이는 그를 조금 강하게 벽에 밀어 붙인 리바이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몸을 가까이 붙였다. 제 몸과 벽 사이에 짓눌려 얕은 숨을 터뜨린 수녀의 몸은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고 바짝 얼어 붙었다.
“Do not ever talk about what you saw, and do not trust anyone. Anyone. They can make you and other sisters disappear without a trace if they find out what you saw.” (지금 본거 절대 이야기하지 마십쇼. 그리고 아무도 믿지 마세요. 아무도요. 당신이 그걸 봤다는 걸 알면 이 사람들은 당신과 자매님들 전부 사라지게 만들 수 있어요.)
“But you… How about you? Are you going to be okay?” (그렇지만 당신… 당신은요? 당신은 괜찮은거에요?)
그의 덜덜 떨리는 차가운 손끝이 리바이의 뜨거운 손등을 덮었다. 그제야 그의 어깨를 단단히 잡은 제 손가락이 불안감을 그대로 드러내며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마주한 시선으로 흘러들어 날 선 긴장감을 쓰다듬는 그의 진심 가득한 걱정은 심장에 각인된 잭의 다정한 손길과 닮아있었다. 본인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을 걱정해주는 수녀에게서는 반짝이며 제 어두운 폭풍우를 잠재워 주었던 잭의 빛이 보였다. 천성이 선한 이들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빛을 잃지 않았다. 호수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그의 온기는 상처만 남은 텅 빈 심장을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충만한 열기로 빠르게 채웠다.
가빠진 숨을 조절하며 의식적으로 호흡을 늦춘 리바이는 긴장한 몸에 힘을 풀었다.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있던 수녀에게서 조금 물러서며 공간을 내어준 리바이의 얼굴에는 그가 조금이나마 안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조그마한 미소가 올라갔다.
“I’ll be fine. Don’t worry about me.” (저는 괜찮을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당장 내일 작전국장이 돌아온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나, 운이 좋다면 그들의 밀거래에 관해 조용히 하는 대가로 돈이라도 더 두둑하게 줄지 모를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현실적으로 예상되는 경우–에는 그들이 깔끔하게 자신을 정리하려 하겠지만… 어차피 용병이란 돈을 받은 대가로 사지로 보내져 반대편에 선 이들을 죽이거나 개죽음 당하는 사람들 아니던가. 잭과 같이 선한 사람을 감싸준 대가로 제 목숨을 잃게 된다면, 그건 그대로 괜찮은 마지막처럼 느껴졌다.
“Now, go back to bed. I’ll see you tomorrow.” (이제, 침대로 돌아가십쇼. 내일 뵙겠습니다.)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수녀를 이끌어 건물 입구까지 데려간 리바이는 직접 문까지 열어주며 그의 등을 어둑한 내부로 떠밀었다.
“Levi.” (리바이.)
조용히 제 이름을 속삭이며 몸을 돌려 선 그는 두 손으로 리바이의 손을 잡아 올렸다.
“Thank you for saving me. May Father in Heaven bless your path.” (날 구해줘셔 고마워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당신의 앞길을 축복하시길.)
성호를 그리며 제 손을 이마에 붙여 짧은 기도를 올린 수녀는 평소와 비슷하게 온화한 미소를 지었으나, 여전히 차가운 손을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축축한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굵직한 눈물방울을 쏟아낼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자신보다 위로가 필요해 보이는 그를 당겨 품을 내어주자 당황해 주저하는 손길이 등을 더듬었다.
“It’s okay to be scared, but don’t worry. You’ll be okay. Everything’s going to be okay. I promise you. God will watch over you and your sisters.” (무서워 해도 괜찮지만, 걱정하지 마요. 괜찮을겁니다. 모두 잘 풀릴거에요. 약속드리겠습니다. 신이 당신과 자매들을 돌봐주실거에요.)
마음 속으로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무고한 이들을 지키겠노라는 다짐을 한 리바이는 잭보다 한참 작은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수녀가 간신히 참고 있던 떨리는 젖은 숨은 그제야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제 몸을 단단히 당겨 안은 그가 쏟아내는 눈물과 조용한 흐느낌이 가슴팍을 뜨끈하게 적셨다.
자신에게 남은 모든 운이 수녀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모두 전해지기를 기도하며 눈을 감은 리바이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잭의 온기를 깊게 들이 마시며 마지막일지 모를 찰나의 평화를 받아들였다.
잭을 품에 가득 안은 채 수 많은 별들이 아름답게 수 놓인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던 순간이 눈꺼풀 너머에서 아른거렸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 담아 깊게 입을 맞추고 제 거친 손끝에 감겨들던 따스한 맨살을 매만지던 기억은 불안하게 쿵쿵대던 심장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금이나마 의미가 생긴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울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잭과 함께한 순간들을 떠올려도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심장을 난도질하던 실연의 아픔이 사라진 자리로는 늘 어두웠던 제 인생에 잠시나마 그의 아름다운 빛을 품을 수 있던 날들을 추억하는, 가슴에 사무치는 행복감만이 가득했다.
리바이의 의식은 제철도 맞이하지 못한 채 사그라든 사랑의 추억이 묻힌 호숫가만을 맴돌았다.
“Do you know anyone named Levi Kane?” (리바이 케인이라는 사람 혹시 아십니까?)
세 달 만에 들은 그의 이름은 잭의 심장을 가차 없이 찔렀다.
프로젝트의 수정된 기획서를 훑으며 급한 걸음을 옮기던 그는 미간을 구긴 채 그 자리에 우뚝 섰다.
“Why?” (그건 왜요?)
휴스턴에서 며칠간 밤낮으로 이어진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치고 맨해튼의 사무실로 곧바로 날아와서도 눈길 한 번 사나워진 적 없던 잭의 험악한 분위기는 그의 개인 비서인 피터를 난생처음으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시 얼어 붙어있던 피터는 간신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A lawyer called this morning to see if he could talk to you, but didn’t leave any note other than to ask you if you knew him. I’ll just…” (오늘 아침에 변호사가 전화해서 당신과 통화를 할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그 사람을 아는지 묻는 것 말고는 다른 메모를 남기지 않았어요. 그냥 제가…)
“A lawyer?" (변호사?)
의아한 듯 묻는 잭의 미간이 조금 더 구겨지자 피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이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턱을 주무르는 제 상사의 침묵이 길어지자 피터의 목덜미로 스멀스멀 불안한 기운이 올랐다.
뭔가 잘못했나? 아무리 물어도 별다른 말을 안 하기에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닌 줄 알았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부드럽고 다정하게 자신을 대하던 상사의 전혀 다른 모습에 불안감이 답답하게 목구멍을 치고 올랐다.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푼 피터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 변호사라는 사람에게 더 열심히 이것저것 캐묻지 않은 그날 아침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고 있었다.
뱃속을 뒤틀리게 만드는 기억을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낸 잭은 그제야 제 비서가 창백하게 굳어있다는걸 알아차렸다. 그의 이름 몇글자에 처참하게 갈라진 가면 아래로 삐뚤어진 이면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날 선 짜증이 관자놀이를 쿵쿵 두드렸다. 깊은 한숨을 터뜨리며 피로한 얼굴을 쓸어내린 잭은 평소와 같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한껏 내렸다.
“Hey, Peter, I’m sorry. I’m a bit under the weather today.” (피터, 미안해요. 오늘 좀 몸이 안 좋네.)
“It’s okay. Don’t worry about it, Jack. You must be tired. Do you need anything?” (괜찮습니다. 걱정하시 마세요, 잭. 피곤하실텐데,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다정하게 팔을 두드려주는 잭의 손길에 그제야 조금 풀어진 미소를 지은 피터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닦아냈다. 잭의 얼굴을 살피는 그의 진심 어린 걱정에는 전문 비서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이 뒤따랐다.
“I think I’ll head back home soon. You can take the rest of the day, too.” (집에 곧 돌아갈 것 같아요. 피터도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해요.)
“Thank you. Do you want me to call the lawyer back for you?” (감사합니다. 변호사한테는 제가 대신 연락 드릴까요?)
“No, don’t worry about it. Can you text me his number?” (아뇨, 괜찮아요. 그 사람 번호, 문자로 보내줄래요?)
그날 새벽까지 기상 예보에도 없던 묵직한 비구름은 빠르게 맨해튼 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작정하고 번호판을 뗀 채 평소보다 거칠게 바이크를 몰아 제 보금자리로 향하던 잭은 꼬리에 따라붙은 경찰 크루저를 떼어내느라 뉴욕 근방을 한참 돌아야 했다. 경찰의 무전이 바쁘게 치직거리며 제 동선을 공유하는 소식은 잭이 직접 제작한 라디오 스캐너의 인이어 헤드셋으로 흘러들었다.
그 어느때보다도 재빠르게 도착한 지원 병력이 고속도로 출구까지 막으려 들었으나, 이미 그들의 전략을 듣고있던 잭은 속도를 높혀 그 사이로 간신히 빠져나갔다. 얼마전 눈여겨본 좁은 뒷골목을 돌자 인적 드문 항구가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내 비구름 반대편의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낸 헬기 두 대가 잭의 위치를 향해 빠르게 가까워졌다. 지난 세달간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새벽녘에 서너번, 수퍼 바이크로 경찰들 약을 올린게 그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탄게 분명했다.
자신을 잡아들이려는 그들의 끈질긴 추격에 위험한 열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 잭의 입꼬리를 올렸다.
항구 내에서도 제한 구역인 만큼 적당한 탈출 루트가 떠오르지 않아 조금 걱정을 하려던 찰나, 바이크에 바짝 엎드린 그의 몸으로 두툼한 빗방울이 하나둘 총알처럼 박혀 들었다. 이내 앞을 보기 힘들게 두꺼운 장대비가 항구와 거리를 뒤덮었다. 창고 건물에 잠시 몸을 숨긴 잭은 경찰차와 크루저들이 쏜살같이 지나간 반대 방향으로 바이크를 몰았다.
얼마 남지 않은 제 명예와 목숨을 담보로 한 그 위험한 스릴을 한껏 만끽한 잭은 속옷까지 흠뻑 젖은 채로 고층 빌딩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스포츠카와 오토바이 여러 대가 늘어 선 조용한 공간에 온 몸을 만족스레 뒤흔드는 배기음이 울렸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슈퍼 바이크를 제 자리에 세워 킥 스탠드를 내린 잭은 그제야 답답한 헬멧을 벗고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흥분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제법 열심히 추격당한 덕분에 잠깐이나마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상념을 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처음 뒤에 붙은 크루저가 조금 더 오래 제 뒤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속도며 탈출 루트를 적당히 조절하느라 지원 병력까지 따라붙어 이번엔 정말 그대로 끌려가는 게 아닌가 잠시 걱정했던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안타깝게도 땅에 발을 붙인 잭의 심장은 바이크의 엔진보다도 더 빠르게 열기를 잃었다.
바이크의 연료통을 살살 쓰다듬으며 제 온 몸을 오르내리던 열기를 떠올리자 척추를 따라 약한 전율이 올랐다. 경찰 무전 채널은 여전히 자신을 찾느라 분주했다. 이미 뉴욕 모든 곳에 깔린 경찰은 새벽까지 도로를 지킬게 뻔했다. 새벽 늦게 비가 그친다 하더라도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추격을 따돌리는 일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저를 쫓던 이들 중 누군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자수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아쉬움만 남기고 사라진 찰나의 쾌락에 고개를 푹 숙이며 답답한 한숨을 내쉰 잭은 시끄러운 헤드셋을 귀에서 빼내며 그제야 긴 다리를 휘둘러 완전히 땅에 발을 붙였다.
“Good run today, kid.” (오늘 잘 달렸어, 키드.)
새까만 제 바이크를 가볍게 두드리며 조용히 속삭인 잭은 빗물을 흘리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세 달 동안 서랍 구석에 처박힌 채 먼지만 먹던 메모리 카드와 명함은 거친 손길에 잡혀 주방 카운터 위로 던져졌다.
도시 중심부 고층에 위치한 차가운 보금자리에 틀어박힌 잭은 파티오 창문 앞에 선 채 굵은 빛줄기 너머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센트럴 파크의 희미한 빛무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맨해튼에 구름이 짙게 낄 때면 그의 공간은 마치 세상에서 단절된 것처럼 느껴져, 그게 조금이나마 잭의 신경을 안정시켰다.
지난 세 달간 잭 하퍼의 숨겨진 오두막이나 난잡한 잠자리 취향과 관련된 그 어떤 기사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고는 나사 극비 프로젝트와 관련된 추측이나 맨해튼 사무실 근처에서 찍힌 심심한 사진들 뿐이었다.
이제와서 리바이 케인의 이름을 들먹이는 변호사가 제게 연락할 일이 뭐가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의 머릿속으로 문득 자신이 리바이 케인에게 속은 유일한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우연을 가장하며 다가온 순진하고 매력적인 사람이 건네는 다정한 손길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히 피해자가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숨은, 기삿감으로 쓰기 좋은 자신 같은 사람이라면…
리바이 케인과의 기억은 아주 잊었다 생각했는데, 다른 누군가를 품에 안은 그가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그들의 명령을 따르며 흥분한 모습을 상상하니 속이 제멋대로 비틀렸다.
제 주제도 모르고 그저 달면 간식인 줄 알고 홀랑 속아 넘어가 다리까지 벌려준 사람이 멍청한 거지.
깊은 한숨을 흘린 잭은 피로한 눈꺼풀을 꾹꾹 눌러 문질렀다.
괜한 불안감에 연락을 미루기엔 궁금한 건 못 참는 제 성질만 살살 긁을 게 뻔했다. 매도 먼저 맞으랬다고, 그냥 눈 딱 감고 연락 한 번 하고 깔끔하게 끝내면 될 일 이었다. 주인 없이도 제철을 맞은 호숫가 부지는 가격을 흥정하려는 구매자가 서너명 있었으니, 다음 달이 되기 전에 모든 걸 정리하면 그곳에 묻은 가슴 시린 기억들도 다시는 찾을 일이 없었다.
여전히 짜증 가득한 얼굴을 쓸어내리고 주방 카운터에 올려진 것들을 거칠게 잡아 든 잭은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주 뒤 다시 찾아올 고강도 훈련을 위해 술을 입에 대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리바이 케인이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는 몰라도, 그동안 자신과 관련된 그 어떤 기사도 나지 않은걸 생각하면 이 작은 메모리 조각이 그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데이터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변호사가 메모리 카드에 관련된 걸 물어볼 테니, 미리 확인해서 나쁠 건 없을 터였다. 그동안 만지지도 않은 그 작은 플라스틱 조각에 자신의 어떤 모습이 들어있을지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거리며 속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심호흡을 하며 문자 메시지에 남겨진 변호사의 개인 번호로 전화를 건 잭은 대기 상태였던 노트북에 메모리 카드를 밀어 넣으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메모리 카드가 단말기에 연결되는 동시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Hello? Who’s this?” (여보세요? 누구시죠?)
“Good evening, Mr. Schumann. This is Jack Harper. I believe you called my office this morning?” (좋은 저녁입니다, 슈먼씨. 잭 하퍼입니다. 오늘 아침에 사무실에 전화를 주셨죠?)
“Ah, Mr. Harper. Glad you called me back.” (아, 하퍼씨. 전화해주셔서 다행입니다.)
연결된 외장 카드의 폴더를 열자 수백장이 넘는 작은 섬네일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알거나 알지 못하는 유명 인사들의 사진들의 존재가 잭의 심기를 건드렸다. 날짜로 시작하는 파일 제목으로 보아 연초부터 며칠 간격으로 꾸준히 찍은 사진들처럼 보였다. 제 사진이야 제일 최근에 있을 테니,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볼 필요는 없었다.
“So you do know Levi, I assume?” (리바이를 알고 계시나봐요?)
“I do, yes. Sorry, what’s this about?” (네, 압니다. 죄송한데, 무슨 일이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그는 변호사 답지 않게 느긋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미 심사가 한참은 뒤틀려있던 잭은 짜증을 숨기지 못한 채 성급하게 날 선 질문을 뱉었다. 자신의 미숙한 모습이 자꾸 드러나는 것 마저 심기를 긁어대는 통에 답답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미간을 구긴 채 휴대전화를 반대쪽 귀에 붙인 잭은 폴더를 최근 수정 순으로 정렬하고는 턱에 힘을 꾹 주며 제일 위에 올라온 사진 파일을 열었다.
잭 하퍼. 오두막. 호수.
가장 최근에 찍힌 사진은 잭이 예상한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모니터를 가득 채운 건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중년 남성이 무언가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이상한 사진이었다.
잭 하퍼의 사진이나 비디오, 그의 최근 목격 장소에 관한 그 어떤 내용도 유출하지 않겠습니다.
종이 한 구석에는 석 달 전의 날짜와 함께 명함에서 보았던 잡지사 기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두번째로 정렬된 사진 파일을 여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Well, uh… I don’t know how well you knew him, since your name was all he gave me before he went to the Middle East. I just wanted to make sure you actually knew him in person before I shared the news.” (그게, 음… 중동으로 가기 전에 리바이가 남긴게 그쪽 이름 뿐이라서, 그 친구를 얼마나 잘 아셨는지는 모르겠네요. 소식을 알려드리기 전에 그쪽이 리바이를 개인적으로 아신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News?” (소식이요?)
기념품점 내부에서 찍힌 사진 속에서 카우보이모자를 쓴 리바이는 그의 앞에 선 사람을 가린 채 무섭도록 차가운 시선으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I got a… call this morning.” (오늘 아침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변호사는 다음 말을 잇기 전 잠시 머뭇거렸다.
두건이 씌워진 채 총성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된 기분이었다.
“I’m sorry for your loss, Mr. Harper. Levi left you a letter in case of his death, saying he owes you an explanation. Do you think you could attend his funeral in San Diego this Saturday?” (유감입니다, 하퍼씨. 본인 사망시에 전해달라며 리바이가 당신에게 편지를 남겼어요. 설명할 일이 있다더군요. 이번주 토요일 샌디에고에서 있을 장례식에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 Mr. Harper?” (… 하퍼씨?)
몽롱하게 부유하던 상념에서 깨어난 잭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가 낀 것 같이 흐릿했다.
“Is that a…” (저거…)
목이 쉰 탓에 제대로 된 목소리도 내지 못한 잭은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늦은 오후의 볕이 드는 창가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제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아차린 장년의 변호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 창가로 다가갔다.
“Levi asked me to take care of this, saying that it won’t survive in the Middle East. I’m sure he would’ve wanted you to have it.” (리바이가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어요. 중동에선 살아남지 못할거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 친구는 당신이 이걸 가져가주길 원할겁니다.)
길쭉한 통조림 캔에 담긴 식물은 여전히 싱그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잭은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제 앞에 놓인 캔을 매만졌다.
“This is…” (이건…)
–리바이와 처음 만났던 헬기 안에서 준 선물인데, 엄청 고마워 하더라구요. 이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진짜 대단한 건 그 사람인데 말이에요. 헬기까지 로프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데, 다람쥐처럼 재빨랐거든요. 리바이가 그 넓은 호수를 수영만으로 몇번씩 건넜다는 이야기는 했나요? 저를 공격하려던 산사자를 사살한 이야기는요?
머릿속 한 구석에 애매하게 처박힌 대외용 가면은 끊임없이 쓸모없는 말을 종알거렸다. 무의식적으로 그걸 내뱉으려던 잭은 버석하게 마른 목구멍을 치고 오른 날카로운 감정에 그대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제게서 이걸 선물 받아 널찍한 품에 소중하게 안은 리바이는 뺨을 붉히며 눈물까지 글썽였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선물답지 않은 선물도 감사하며 받는 그가 요새 사람들 답지 않게 순수하다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헬기에 올라 탄 그가 다짜고짜 제 눈동자에 금빛이 많이 돈다는 말을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에게도 비슷한 감상을 돌려주자 뺨이며 귓바퀴까지 새빨갛게 변해서는…
반나절동안 끊임없이 떠올리던 리바이의 다양한 모습들이 또 다시 차오른 눈물과 함께 시야를 일렁였다. 지난 세 달간 곪은 상처를 먹고 자란 흉측한 오해는 존재하지도 않는 음침한 목적을 이유로 리바이와 함께한 추억들을 산산조각 내어 망각의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억에 남은 조각난 순간들을 하나둘 찬찬히 돌아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리바이가 제게 준 건 그의 맹목적인 애정 뿐이었다.
무전기를 바닥에 떨구며 돌아선 자신을 간절하게 부르던 리바이의 외침은 호수를 넘어 미약하게 제 귓가를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 그를 돌아 봤다면, 호수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의 진심을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호수를 건너 그에게 돌아갔다면, 그가 중동으로 가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
딱 한마디 만이라도 들어볼 걸. 그냥, 딱 한 마디만…
밤새 잭을 괴롭힌 때늦은 후회는 또 다시 발톱을 세워 이미 너덜너덜한 심장을 찢어발겼다.
“I made a mistake. I thought…” (실수를 했어요. 저는…)
침묵한 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몇 마디 단어를 꺼낸 잭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답답한 한숨만 흘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He told me what happened. He understood your actions and never blamed you for it. His only concern was you, Mr. Harper.”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어요. 리바이는 당신을 이해하고 원망하지 않았어요. 그가 걱정한 건 당신 뿐이었어요, 하퍼씨.)
부드러운 변호사의 다정한 목소리 너머에는 자신과의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끝내 제 걱정만 하는 리바이의 외로운 뒷모습이 보였다. 이미 한참 전에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을 또 다시 제 두 손을 가득 채웠다.
이제 와서 발악해봐야 달라질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목을 죄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삼키지 못한 볼품없는 감정을 아무리 흐느껴도 가슴팍에 눌어 붙은 무거운 감정들은 당최 쏟아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철조망이라도 둘러싸인 듯 심장을 찌르며 옥죄는 고통에 얕은 숨만 헐떡이던 잭은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에 목을 벅벅 긁었다.
“I’m… sorry. I’m sorry. I know I should leave. I… Could you give me a… a few minutes…” (죄송… 합니다. 죄송해요. 자리를 비워야 하는건 아는데. 몇 분만… 시간을 주시면…)
“Jack—Can I call you Jack?” (잭—잭이라고 불러도 괜찮나요?)
책상을 돌아온 변호사는 의자를 끌어와 잭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으며 조용히 물었다. 한심해 보일게 뻔한 얼굴을 돌린 잭은 티슈 한장을 더 뽑아 축축한 뺨을 닦으며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목 근처를 배회하던 손은 변호사의 단호한 손길에 잡혀 내려갔다.
“Jack. I’m really sorry for your loss. I've only met Levi a few times over the years, but I was quite fond of him. He was gentle and vulnerable inside the hard shell he put around himself, just like my husband.” (잭. 이런 일이 생겨서 정말 유감이에요. 지난 몇년간 본 건 몇 번 안되지만, 리바이는 마음에 들었던 친구랍니다. 본인 주위로 세운 단단한 벽 안쪽으로는 부드럽고 연약했거든요. 제 남편처럼 말이에요.)
여전히 제 손을 단단히 잡아 내린 채 티슈 한 장을 뽑아 든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제 목을 닦아 주었다. 피부 위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이 몽롱한 의식을 건드렸다. 자신도 모르는 새 피가 나도록 제 목을 긁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차갑게 식어 덜덜 떨리는 제 손을 쓰다듬는 변호사의 걱정 가득한 손길에서 리바이의 온기가 느껴졌다. 자신 말고도 그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와 리바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너덜너덜해진 잭의 마음에 미약하게나마 위로가 되었다.
잭은 호수를 떠난 뒤로 벗은 적이 없는 가면 뒤에 가려져 있던 못난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변호사를 마주했다. 그의 인자한 눈매에는 그 어떤 판단이나 비난도 없이, 리바이가 심어 놓았을 깊은 슬픔만이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리바이의 온기가 느껴지는 그의 손을 단단히 잡은 잭은 울렁이며 터져 나온 울음을 쏟아냈다.
변호사는 그렇게 잭의 곁에 앉아 잠깐 아무런 말 없이 슬픔을 나누었다. 잭의 흐느낌이 조금 사그라들 때까지 손을 쓰다듬어주던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의 작은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들고 돌아왔다. 책상 위에 놓인 유리잔을 다시 채워 손에 쥐여주는 무언의 재촉에 잭은 억지로 물을 제 목구멍으로 욱여넣었다.
“Jack. Don’t worry about anything else today, and just take as much time as you need. I’ll keep my study empty for the rest of the day.” (잭, 오늘은 다른 일 생각하지 말고, 필요한 만큼 시간을 가지도록 해요. 오늘 제 서재는 비워놓을게요.)
알게 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은 자신에게 대뜸 개인 서재를 내어주겠다는 제안은 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이따금 사무실로도 쓴다던 변호사의 아담한 서재는 그와 그의 남편이 거주하는 타운하우스의 일부였다. 아무래도 지금 이 상태로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테니, 몇 번을 생각해도 자신이 그들의 개인적인 공간에서 피해주는 게 맞는 일처럼 느껴졌다.
“No, Mister–” (아닙니다, 슈먼–)
“Please, call me Danny. Unless you don’t want to be here, please let me at least give you a safe place to grieve.” (대니라고 불러줘요.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게 아니라면, 당신이 안전하게 슬퍼할 수 있는 공간이라도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잭의 어깨를 잡아 누른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자국이 남은 목덜미를 훑어보며 제 팔을 주무르는 그의 손길에서 은근한 강요가 느껴졌다.
책상 위에는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유언장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리바이가 남긴 마지막 편지를 읽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리바이의 죽음에 대해 아직 궁금한 것도, 묻고 싶은 것도 한가득하였다. 호텔 방에 혼자 틀어 박혀 나눌 수 없는 슬픔에 허우적대는 것보다야 이곳에서 어느 정도 마음을 갈무리하고, 변호사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듣는 게 몇 배는 더 나을 터였다. 리바이가 남긴 인연이기에, 짧은 만남 만으로도 빠르게 가까워진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도 그새 한가득 자라난 탓도 있었다.
“Thank you, Danny.” (고마워요, 대니.)
“Not a problem, Jack. Let me know if you need anything—My husband and I will be in the next room.” (천만에요, 잭. 필요한게 있으면 알려주세요. 저랑 제 남편은 옆 방에 있을게요.)
잭은 젖은 미소를 지으며 쉰 목소리로 다시 한번 간신히 진심을 전했다. 제 어깨를 두어번 더 쓸어내려 준 변호사는 어둑해지기 시작한 실내를 밝히는 탁상 등을 켜주고는 그대로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사무실에서 잭은 또 다시 밀려온 리바이와의 추억과 바닥없는 슬픔의 파도에 제 의식을 흘려보냈다.
책상 위에 올려진 두툼한 편지를 집어 드는 데에만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볼품없이 떨리는 손끝에서 편지 봉투가 쉴 새 없이 바스락거렸다. 간신히 봉투를 열어 종이 뭉치를 꺼내든 잭은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후 큼지막한 손글씨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이 편지를 읽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시작된 글은 마을에 같이 내려갔을 때 저를 쫓아 다니며 사진을 찍던 기자에게서 압수한 메모리카드와 명함에 대한 진실과 함께 그 일에 대해 제때 알려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죄가 적혀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는 것도, 본인을 오해했던 것도 전부 이해하니 자책하며 괴로워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적힌 글씨에는 떨리는 손길이 남아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점 거짓 없는 진심만을 건넨 그에게서 잔인할 정도로 쉽게 돌아선 자신을 향한 그 어떤 원망의 말은 없었다.
이 모든 오해와 단절은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혀 리바이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자신 때문인데, 어째서 그가 사과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의 불신이 심장을 몇갈래로 갈기갈기 찢어놓는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해준 그에게는 그것보다도 더 잔인한 상처를 남긴 걸까. 단 한 번의 해명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채 홀로 남겨진 그는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에게 그런 상처를 남긴 자신에게 손가락질 한 번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글을 써 내려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리바이가 없는 곳에서 느껴지는 그의 진심의 깊이에 또 다시 눈물이 죽죽 흘렀다.
미안해, 리바이. 미안해. 전부 다, 내가 잘못했어. 리바이…
너무 늦어버린 사과의 말만 몇번을 되뇌던 잭은 편지까지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채, 또 다시 그렇게 한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억지로 슬픈 마음을 욱여 눌러 내리며 고개를 들자 어느새 잔뜩 낮아진 저녁의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사이로 새어 들어와 책상 위에 놓인 리바이의 유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한 마지막 노을이 문득 눈앞을 일렁였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제대로 돌봐 주려면 쓸모없이 굴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기에, 젖은 한숨을 터뜨리며 고개를 흔들어 애써 우울한 상념을 지운 잭은 한없이 무겁기만 한 종이 뭉치를 다시 집어 들었다.
…
당신을 처음 품에 안고 잠이 든 날, 우리가 함께하는 꿈을 꿨습니다.
우리 둘이 호숫가에서 평화롭게 사는 꿈이었어요.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던 날, 우린 마지막 저녁노을이 가득한 호숫가 풀밭에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만 바라봤고, 당신은 그런 나에게 당신의 마지막 숨을 내어주었습니다.
당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잭.
내 시선이 닿는 매 순간, 당신은 아름다워요.
당신을 알아가고, 당신과 사랑에 빠진 모든 순간은 어둡고 외롭기만 하던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내 숨이 다할 때까지, 나는 당신을 생각했을 겁니다. 미소를 짓는 당신의 눈동자가 어떻게 반짝이는지, 내 품에 안긴 당신의 목소리가 내 목덜미를 어떻게 간지럽히는지, 천천히 입을 맞추면 당신의 볼이 어떻게 달아오르는지…
혹여 내가 황무지에서 홀로 죽었다고 하더라도, 당신과의 추억 덕분에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외롭지 않았다는 걸 알아주길 바랍니다.
잭. 언제나 외롭기만 하던 호수에 자리를 잡아 줘서 고맙습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꿈 같은 날들을 떠올릴 때면, 당신이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내 인생에 빛을 가져다준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길을 잃고 방황 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고백할게 있습니다.
그 날, 나는 당신을 평생 내 곁에 묶어놓고 싶은 어두운 욕망을 참지 못하고 당신을 향해 총구를 겨눴습니다. 우리가 지낸 시간이 하루라도 더 길었다면, 나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을지도 모릅니다. 내 곁에서는 안전하다 믿었던 당신이 다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헬기를 망가트리면 당신이 떠나지 못할 거라는 끔찍한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날 향하는 당신의 눈동자에 깊게 남은 상처를 마주하고 나서야 나에게 당신의 날개를 꺾고 족쇄를 채울 자격 따위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당신에게 깊은 상처만 남겼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이 나의 더러운 손길을 안전하게 벗어났다는 사실이 나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당신은 모르시겠죠.
끝까지 이렇게 이기적인 나의 죽음에 당신이 너무 오래 상심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별들 사이에서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우리가 함께하는 꿈을 꾸고 있겠습니다.
그때까지 당신의 앞날에는 행복한 날들만 가득하기를.
사랑합니다, 잭.
Yours forever,
Levi Kane.
리바이의 마지막 편지를 허망하게 모두 읽고 나서 한참을 슬픔의 폭풍우에 가라앉아 익사하던 의식이 일순간 날을 세운 화마로 변해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유서를 쥔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 덜덜 떨렸다.
이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나 역겨운 장난인 게 분명했다. 리바이가, 호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수영해 건널 수 있고, 단 한 번의 저격으로 호수 너머의 맹수도 사살했던 그가, 수습할 시신조차 돌려 받지 못한 채 이리 허망하게 죽었을 리 없지 않은가. 하루하루가 끔찍하게 길었던 지난 석 달의 오해를 푼 자신의 사과조차 받아주지 않은 리바이가 자신만 덩그러니 내버려 두고 이대로 떠났을 리가 없었다.
참기 힘든 분노가 기어올라 눈앞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LEVI KANE!” (리바이 케인!!)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 잭은 리바이의 마지막 글이 담긴 종잇장을 구겨 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앉아있던 의자가 바닥을 긁다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무 바닥을 나뒹굴었다.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새빨간 분노가 온 몸의 신경 말단을 새까맣게 불태웠다.
“COME OUT, YOU FUCKING COWARD!” (나와, 이 개같은 겁쟁이 새끼야!!)
고요한 서재를 돌아보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 잭이 집어 던진 유서는 가벼운 종잇장이 되어 팔랑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서재의 문을 열고 나가면 리바이가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저를 품에 안아줄게 분명했다. 이 모든 게 질 나쁜 장난이었다고, 이제야 본인이 느꼈던 고통을 조금 느꼈느냐 묻겠지. 그 멍청한 얼굴을 한 번 때려주고 당황해 휘청이는 큼지막한 몸뚱아리를 바닥에 눕혀 올라 타면 귓바퀴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서는 제 눈치를 보며 그제야 미안하다 할게 눈에 선했다.
성난 숨을 씩씩거리며 서재의 문으로 향하던 잭은 허둥지둥 달려들어 온 변호사를 맞닥뜨렸다.
“Jack, what's–” (잭, 이게 무슨–)
“What the fuck is this? Where the fuck is Levi?!” (이게 지금 씨발 뭐 하자는 거야? 리바이 어딨어?!)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서재에 이리저리 뿌려진 편지장을 훑던 변호사의 멱살을 틀어 잡은 잭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예상치 못한 잭의 행동에 놀라 반사적으로 변호사를 감싼 그의 남편은 잭의 손목을 잡아 떼어내려 노력했으나, 손마디가 희게 힘이 들어간 손가락은 조금의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Mr. Harper! Please, calm down!” (하퍼씨! 제발, 진정하세요!)
“I know that fucker is here, so stop playing this sick joke.” (그 개새끼 여기 있는거 다 아니까, 역겨운 농담은 그만 하라고.)
“Jack…” (잭…)
이성을 밀어낸 분노를 잠재운 건 잭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변호사의 떨리는 손길이었다. 잭을 응시하는 그의 큼지막한 눈망울엔 깊은 연민과 슬픔 이외에는 그 어떤 거짓도 담겨있지 않았다. 찾아온 것 만큼이나 빠르게 열기를 잃은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절망 뿐이었다. 셔츠 깃이 구겨지게 변호사의 멱살을 잡고 있던 잭은 그에게서 조금 물러서며 방금 전 자신이 자비 없이 구긴 셔츠를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매만졌다.
“Danny, Mr. Schumann, I’m sorry. I’m so sorry. I, I didn't mean to…” (대니, 슈먼씨,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이런, 이러려던게 아닌데…)
“Jack, I'm so sorry for your loss.” (잭, 진심으로 유감이에요.)
제 손을 덮어 잡은 변호사의 진심 가득한 위로의 말에 날 선 분노가 또 다시 치고 올랐다. 튀는 곳을 알기 힘들게 제멋대로 이리저리 오르내리며 뱃속을 비틀어대는 감정은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웠다. 미간을 험악하게 구긴 잭이 턱에 힘을 주며 이를 뿌득 갈았다.
“STOP SAYING THAT! LEVI IS NOT–” (그 말 좀 그만 해요! 리바이는 안–)
“Mr. Harper, please.” (하퍼씨, 제발요.)
잭이 그의 멱살을 잡기 전, 긴장한 채 여전히 변호사를 감싸고 있던 그의 남편이 재빠르게 손을 뻗어 잭을 단호하게 밀어냈다. 리바이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이자, 제게 리바이를 데려와 줄 수 있는 변호사의 온기가 손끝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신경을 긁어내리던 분노는 꼬리를 말고 사라졌다.
이건 전부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장난일 뿐일 텐데, 왜 아직도 리바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설마, 정말로 리바이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냉혹한 현실에 대한 공포는 그 차가운 촉수를 늘어뜨리며 스멀스멀 잭의 뒤통수를 기어 올랐다. 여전히 바닥을 모르는 눈물이 또 다시 차올라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다 뺨을 적셨다. 묵직한 게 폐에 눌어 붙어 숨이 얕아지자 힘이 빠진 다리가 바들거렸다. 눈앞이 어질어질한 탓에 떨리는 숨만 삼키며 눈을 두어번 깜빡이던 잭은 결국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변호사의 손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I'm sorry, Mr. Schumann. Please, just… Could you go tell Levi that I'm really sorry? Tell him that I made a stupid mistake. It's all my fault. He doesn’t have to play this fucked up game with me.” (죄송해요, 슈먼씨. 제발, 그냥… 리바이한테 잘못했다고 전해주시면 안될까요? 내가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가서 알려줘요. 다 내 잘못이에요. 이런 엿같은 장난 더 이상 칠 필요 없다고 해줘요.)
끊임없이 눈물이 차오르는 시야로는 제 앞에 선 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기 어려웠으나, 바들거리는 입꼬리까지 올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은 잭은 제 남은 진심을 모두 담아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잭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는 문밖으로 나가 리바이를 데려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잭에게 잡힌 손에 힘을 주어 더욱 단단히 쥐며 몸을 낮춘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달달 떨고 있는 잭을 다정히 감싸 안았을 뿐이었다.
“I'm so sorry.” (정말 미안해요.)
“No, nonono, please. Don't be like this. I just… I just want to hold him, Danny. Please, could you just… bring him here? I'm not gonna… Tell him I won't get mad. I'll never be mad, I promise. I just want to see him, please…” (아뇨, 안돼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저는 그냥… 그냥 그 사람을 잡아보고 싶어요, 대니. 제발, 그냥… 여기로 데려와 주면 안될까요? 화 안낼 거라고, 절대 화 안 낸다고 전해줘요.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래요, 제발…)
“Jack.” (잭.)
“Okay, I understand… I understand if he doens't want to see me again. Alright? I get it. It's okay if he's never going to forgive me. I don't… I don't have to see him. Just… Just tell me he's not dead. Please, Danny, I'm begging you.” (알겠어요, 이해해요… 그 사람이 다신 날 보고싶지 않다고 하면 이해 한다구요. 알겠죠? 이해해요. 리바이가 날 평생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 사람 안 봐도… 안 봐도 괜찮으니까. 그냥… 그냥 리바이가 죽지 않았다고만 말해줘요. 제발요, 대니, 이렇게 빌게요.)
“Jack… I'm sorry.” (잭… 미안해요.)
계속해서 부정하고 외면하던 냉혹한 현실은 계속해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변호사의 위로와 함께 잭의 의식을 범람하며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마지막 희망을 짓뭉갰다.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운 무거운 절망감에 고개를 저을 힘도 사라진 잭은 그저 제 몸을 감싸는 다정한 온기에 모든 걸 맡긴 채 새어 나오는 울음을 흐느꼈다.
“Please, no… Please, don't tell me this is all I have left of him…” (제발, 안돼요… 부탁할게요, 리바이의 존재라고 남은게 이것 뿐이란 말은 하지 말아줘요…)
“I'm sorry, Jack. I'm really sorry.” (미안해요, 잭. 정말 진심으로 유감이에요.)
끊임없이 쏟아지는 무거운 감정에 숨을 제대로 쉬는 일 조차 버거웠다. 어두운 구석으로 밀려 내려가는 의식에는 조각난 리바이와의 추억들만이 남아 자리를 지켰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자 뺨을 붉힌 리바이가 헤이즐 눈동자를 반짝이며 제게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못할 이의 이름을 몇번이고 부르자 이미 오래전 잊었다 생각했던 소중한 기억들이 하나둘 제 모습을 되찾아 돌아왔다.
리바이, 진심으로 미안해요. 직접 만나서 당신에게 사과를 빌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언제나 떨리는 손길로 조심스럽게 손등을 쓸곤 했다.
리바이,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
저녁 노을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는 언제나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리바이, 당신이 너무 그리워요.
그의 따스하고 묵직한 체향은 언제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 리바이, 당신을 사랑해요.
꿈과 무의식을 몽롱하게 부유하던 의식은 익숙하지 않은 전화벨 소리를 따라 한기 서린 현실로 떠올랐다. 짓눌러 부은 눈매를 간신히 깜빡이자 새벽의 푸른 빛이 가득한,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 흐릿한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잭이 뿌옇게 안개가 낀 머릿속을 헤매며 현실에 발을 디디지 못하는 사이 청명한 벨 소리가 규칙적으로 서재를 울렸다. 그 소리에 집중하며 억지로 몸을 세워 앉자 품에 한가득 안고 있던 종잇장이 바스락거리며 흘러내렸다. 그제야 잭은 이곳이 여전히 변호사의 서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입 안이 바짝 말라 텁텁했다. 리바이의 유언을 읽고 난동을 부린 이후로는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며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게 분명했다. 푹신한 소파에 기대 앉은 잭은 무거운 한숨만 푹 뱉어내고 피곤한 얼굴을 쓸어 내렸다. 부끄러움 따위를 느끼기에는 몸도 마음도 지나치게 지쳐있었다.
끈질기게 이어지던 벨 소리는 잭의 신경을 긁기 직전이 되어서야 녹음된 변호사의 인사말을 재생했다. 그저 잡음처럼만 들리는 변호사의 목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며 제 손에 남은 종잇장을 들어 올리자 한 장 빼곡하게 적힌 리바이의 글씨가 가득했다. 버석한 얼굴에 종이를 가까이 가져와 깊은 숨을 들이켜도 그저 서재의 깨끗한 향기만 감돌 뿐이었다.
리바이의 온기도, 체향도, 목소리도, 세상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차갑고 고통스러워도, 결국은 이게 현실이었다. 짓무른 눈가는 더 이상 나오지도 않을 눈물을 찾아 욱신거렸다.
단 한 번만이라도 리바이를 품에 안을 수 있다면—
— Daniel, this is Levi. Levi Kane. (다니엘, 저 리바이입니다. 리바이 케인.)
잭없리... 리없잭.............
너무 고 통...스럽네요 이거 쓰느라 현생 살기 힘들었습니다 흑흑... 가상의 인물들때문에 힘든건 언제 없어질까요 젠장~ ㅠㅠㅠ 원래 두편으로 나눠서 쓸 예정이었는데 힘들어서 그냥 하나로 합쳤습니다 ㅠㅠ 그래서 분량이 뚱뚱해졌네요 허허 죄송합니다... 그래도 고통은 지나갔으니 ㅠㅠ 담편부터 어케 기력 회복해보겟습니다 꾸벅...
너무 힘들어서 마음의 안식을 위해 스리슬쩍 텔톰필모크오 아담캐피 한 줌 넣어봤습니다... 어퓨굿맨 시대에 만나서 결혼까지 한 아담캐피... 캐피가 은퇴하고 나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일찍 제대했으나 기댈 곳 없는 젊은 군인들 무료로 도와주는 변호사 일을 하는 설정입니다 🤗 아담은 근처에서 베이커리겸 카페 사장님... 안정적으로 사랑하는 아담캐피 너무조와... 😇🤤💖
이번편도 흥미롭게 읽어주셨다면 기쁩니다 🤗 다음주부터 여행이라 조금 바쁠 예정이지만 계속해서 열심히 낋여보겠습니다 후후... 감사해요!! 리바이잭 흥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