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fe Space (15)
Published on March 7, 2026 by acorn_field
[The Gorge] Levi x [Oblivion] Jack :: 텟이 침공하지 않은 세계의 잭이 협곡에 가지 않은 리바이와 만나는 이야기
텔톰 필모 크오
[The Gorge] Levi x [Oblivion] Jack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이번 물자 교환에는 지난번 리바이가 직접 목격한 것 보다는 조금 더 많은 인원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 I’ll stand by and watch the situation until the force arrives. I can pop a tire or two if needed, but…” (… 저는 여기서 정부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상황 주시하겠습니다. 필요하면 타이어라도…)
시간대에 맞지 않게 부산한 거리를 내려다 볼수록 무언가 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시선에 걸렸다. 누가 듣기라도 할까 소리 없이 재빠르게 움직여도 모자랄 텐데, 상자를 옮기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그저 느긋하게 서로 이야기나 나누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상황을 감시해야 할 작전 부장이나 팀장의 모습은 거리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기시감이 의식 너머에서 일렁이는 사이, 전조등도 켜지 않은 새로운 트럭 하나가 어두운 거리 멀리서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를 내며 가까워졌다. 건물 밖에서 빈둥거리며 담배나 태우던 이들이 차량을 발견하고는 하나둘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본능적인 불안감이 날을 세웠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음침한 소리를 내며 속도를 줄이던 트럭이 정차하기가 무섭게 건물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거칠게 끌려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더러운 자루를 쓰고 손이 뒤로 묶인 채였고, 그들을 억센 손길로 쥔 용병들에 비해 지나치게 마르고 작았다.
“Fucking assholes! Fuck, goddamnit! I’m sorry. I have to go! Thank you for everything. Destroy your phone, right now. Goodbye, Daniel. Take care.” (씨발, 미친 새끼들! 젠장, 젠장! 미안합니다. 가봐야겠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휴대전화는 당장 폐기처분 해요. 잘 있어요, 다니엘. 몸 조심해요.)
머리 끝까지 치솟은 분노에 귓가에는 쿵쿵대는 제 심장 소리로 시끄러웠다. 급히 전화를 끊고 두 동강 낸 위성 전화를 짓밟아 박살 내면서도 리바이의 온 신경은 거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건물 주위로 무장한 머릿수가 많아 섣불리 저격을 시작했다가는 고작 두어명을 처리한 대가로 무고한 이들이 그 사이에서 피를 볼게 뻔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줄지어 나오던 행렬에 끝이 보였다. 언제 도착할지도 모를 정부군을 기다리는 사이 트럭이 출발하기라도 한다면…
트럭 밖에 세워진 사람들은 짐짝처럼 다뤄지며 더러운 천막으로 가려진 트럭 짐칸에 던져졌다. 건물에서 끌려 나온 사람들 중 마지막 두어명만이 남은 순간이 되어서야 욕지기를 뱉어낸 리바이는 조급하게 소총을 들어 올렸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영들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타이어가 십자선에 들어왔다. 숨을 내쉬며 손끝을 방아쇠에 올리면 타깃과의 거리나 풍향 따위의 정보는 자연스레 의식의 일부가 되었다. 완벽한 저격의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건물 위에서 날아든 총알이 트럭의 타이어를 터뜨리자 파열음과 함께 그 주위로 충격파가 스치고 지나갔다. 예상하지 못한 총격에도 불구하고 중무장한 이들은 매고있던 소총을 들고 서로 무어라 외치며 익숙한 몸놀림으로 방어 대세를 취했다. 재빠르게 트럭의 타이어 하나를 더 날려 보내고 벽 뒤로 몸을 숨기기가 무섭게 총알이 빗발처럼 날아들었다.
그러나 짧기만 한 소란은 총격을 멈추라는 누군가의 성난 명령과 함께 몇 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조금 떨어진 창문 근처로 자리를 옮긴 리바이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거리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내렸다.
“I know you are here, Levi Kane!” (여기 있는거 다 알아, 리바이 케인!)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떨고 있는 사람의 형체 하나가 건물의 입구 앞에 간신히 서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얼굴이 가려지고 손이 뒤로 묶인 그의 옆구리에는 건물 벽에 가려진 채 총구만 드러낸 소총이 바짝 붙어있었다.
“I’ll give you 10 seconds to come out!” (튀어 나올때까지 10초 주도록 하지!)
자신을 꾀어내기 위해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이를 총구 앞에 세운 사람은 다크레이크를 등에 업은 냉혈한이었다. 10초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생각 할 시간조차 없었다. 건물의 바로 아래에는 적당히 뛰어내릴 만한 가판대나 차량 따위는 부재했다. 재빠르게 소총의 어깨끈을 벗어 던지며 욕을 짓이긴 리바이는 건물의 계단을 향해 달렸다.
“Levi Kane. Never thought I’d see your stupid face again.” (리바이 케인. 네 그 멍청한 낮짝을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작전 국장이 무릎이 꿇린 채 앉은 리바이의 턱을 잡아 양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조소하고는 깊게 넘긴 담배 연기를 얼굴에 뱉었다.
아무런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문 리바이는 등 뒤로 묶인 손으로 주먹만 단단히 쥐었다. 팔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손목을 단단히 조인 집타이가 더욱 깊게 살을 파고들었다. 단단한 군홧발에 맞은 왼쪽 눈두덩이가 부은 탓에 눈앞이 조금 흐릿했으나, 발길질을 견디는 것보다는 작전 국장의 재수 없는 얼굴을 코앞에서 보는 일이 더 고역이었다. 차라리 그냥 계속 화풀이나 받으며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You know, you could’ve run away when we thought you were dead. You would’ve been back home by now.” (네가 죽은줄 알았을 때 도망쳤다면 지금쯤 집에 도착했을텐데 말이지.)
“And make your half-ass snipers’ work easier? No thanks.” (당신네들이 고용한 변변찮은 저격수들이 거저 먹을수 있게 도와주라는 겁니까? 이쪽에서 사양하겠습니다.)
잠겨 갈라진 목소리와 함께 잔기침이 따라붙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느라 상처 난 입술에서 뜨끈한 피가 울컥 솟아 이를 적셨다. 같잖은 조롱이 조금이라도 신경을 긁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작전 국장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두어번 더 빨아들이는 동안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리바이의 얼굴만 위아래로 훑어볼 뿐이었다.
“And you thought your best option was to reach out to the US military for help? Don’t tell me you were stupid to believe they would give a single fuck about what Dark Lake does here and there.” (그래서 네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 미 정부군에 도움을 요청하는 거였나? 미국 정부군이 다크레이크가 여기저기서 뭘 하고 다니는지 좆만큼이라도 관심을 가질거라고 믿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텐데.)
그 순간 리바이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다니엘이 자신을 배신했을 리는 없으니, 다크레이크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누군가가 이번 일에 섞여 든 모양이었다. 그들이 이미 다니엘과 그의 가족에게 손을 뻗었을 최악의 가능성도 존재했다. 변호사라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제 목소리만 듣고 자신을 믿어준 다니엘이 위험한 일에 휘말렸을지 모른다는 걱정까지 생각이 끼치자 눈앞이 아찔했다.
딱딱하게 굳은 리바이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전 국장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Yeah, surprise, buddy. Nobody's coming to save the day. I’m the only one you can beg for your life.” (그래, 깜짝 선물이야, 친구.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을거야. 네가 살려달라고 빌 수 있는건 나 뿐이라고.)
꽁초가 되도록 짧아진 담배를 리바이의 허벅지에 뭉개 짓누른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옷감 아래로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이가 뿌득 갈렸다. 턱뼈를 으스러트리기라도 하려는 듯 단단히 턱을 잡고 있던 작전 국장의 손길이 떨어지고 나서도 마주한 시선은 그대로였다. 신음조차 내지 않은 리바이는 미간을 잔뜩 구기면서도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다.
불이 꺼진 담배꽁초가 살점에서 멀어져도 생살이 불타는 끔찍한 감각은 여전했다.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고통에 집중한 리바이는 아찔하게 멀어지려는 의식을 현실로 끌어 내렸다. 이제 와서 죄책감이나 절망에 빠져봐야 달라질 건 없었다. 정부군이 오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이 일에 말려든 무고한 이들을 구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You got me now, Director. Please, let them go. They don’t know anything.” (날 잡았잖습니까, 국장. 저 사람들은 제발 보내 주십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아닙니까.)
떨리는 날숨을 최대한 자제하는 리바이의 부탁은 낮게 갈라진 처참한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코웃음을 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작전 국장은 멀지 않은 곳에서 용병에게 잡혀있던 수녀에게 다가갔다. 짐짓 친한 척 그의 어깨 위로 팔을 올리자 손이 뒤로 묶인 작은 몸이 위험하게 휘청였다.
“Well, you tell me, Kane. Do you think they still have no idea what the fuck is going on?” (글쎄, 네가 말해봐, 케인. 이 사람들이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좆도 모르고 있을거라고 생각해?)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덜덜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서 있던 이는 그의 몸을 미는 손길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제껏 그의 머리를 덮고 있던 자루를 벗긴 작전 국장은 거칠게 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려 꿇어앉혔다.
그날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밝은 미소와 함께 다른 자매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 수녀는 눈두덩이며 뺨이 잔뜩 부은 채 재갈이 물려있었다. 리바이를 마주한 사만다의 어둑한 시선에는 리바이가 익히 알고 그리워하던 빛나는 녹빛 대신 희망을 잃고 체념한 이의 음울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Is this really necessary? What do you get from all this shit?” (이러는게 정말 필요한 겁니까? 이딴 짓을 해서 얻는게 뭐가 있습니까?)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리바이의 양 어깨 위로 그의 주위에 서 있던 이들의 거친 손길이 강하게 내려앉아 그를 고정했다. 두 손목을 묶은 집타이가 결국 피부를 찢고 파고들었다. 온 몸 이곳저곳에서 아우성을 치는 크고 작은 고통에고 불구하고 리바이의 온 신경은 선한 이가 비인간적인 대우에 무력하게 휘둘리는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과 정도를 넘어선 악행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향한 뜨거운 분노로 가득했다.
“What do I get? Money, of course. But also…” (뭘 얻느냐고? 당연히 돈이지. 그리고…)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며 허벅지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컴뱃나이프를 꺼내든 작전 국장은 제 손에 잡힌 작은 머리통을 제 다리 사이에 문질렀다.
“I can have some fun. I mean, why not? They’ll be dead by the sunrise anyways.” (재미도 조금 볼 수 있지. 안 될 이유가 있나? 해 뜨기 전에 다 죽을 목숨인데 말이야.)
연약한 목덜미를 쓸어 올리는 칼등의 한기에 눈을 질끈 감은 사만다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게 우습다는 듯 리바이의 주위의 선 이들이 경박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지난 몇 달간 동고동락한 이들이 예상한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인간 말종들이었다는 깨달음에 온 몸으로 소름이 끼치는 한기가 기어 올랐다.
“You sick fuck! What the fuck is wrong with you people?” (역겨운 자식! 당신들 도데체 뭐가 문제야?)
“Ha! Do you think you’re different? You think you are better than us?” (하! 넌 다른 줄 알아? 네가 우리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나?)
힘 없는 마른 몸을 거칠게 모랫바닥으로 내친 작전 국장은 느긋한 걸음으로 리바이에게 다가왔다.
“You are worse, Kane. You are weak.” (넌 훨씬 더 악질이야, 케인. 넌 약하거든.)
리바이의 앞에 몸을 낮춰 앉은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사뭇 다정한 손길로 리바이의 뺨을 툭툭 쳤다.
아무리 침착하게 생각하며 머리를 굴려봐도 작전 국장이 관대하게 자비를 내려주지 않는 이상 사만다와 자매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손 닿는 곳에 쓰러진 무고한 사람 한 명을 지킬 힘조차 없으면서, 무슨 배짱으로 다니엘까지 끌어들인 걸까. 차라리 그가 저를 배신한 거라면 좋을 텐데, 그럴 사람이 아닌걸 알기에 눈앞이 깜깜했다.
풀어낼 길 없는 묵직한 분노는 새까만 절망감의 덩어리가 되어 폐에 늘어붙었다.
“You are right, Director. I’m sorry, alright? I fucked everything up because I’m weak. Kill me, torture me, whatever the fuck you want to do—please do it to me. But please let them go. I’m begging you, Director. They don’t deserve any of this.” (당신 말이 맞습니다, 국장님. 죄송합니다. 내가 나약해서 모든걸 망쳤습니다. 죽이든, 고문을 하든, 저한테 전부 마음대로 해주시고 제발 저들은 놓아주십시오. 이렇게 빌겠습니다, 국장님.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혹여 조금이나마 남아있지 모를 작전 국장의 인간성에 절박하게 매달린 부탁은 볼품없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기어 나올 뿐이었다. 무참한 발길질이나 생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던 리바이의 뺨은 무력하게 죽죽 흐른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Pathetic.” (한심하군.)
작전 국장은 그저 짜증 가득한 얼굴로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트럭의 타이어를 갈아 끼우던 이들은 이내 모든 작업을 마쳤노라 알렸다. 작전 국장이 가볍게 턱짓을 하자 리바이의 주위에 자리 잡고 있던 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제 할 일을 찾아갔다.
“Time’s up, buddy.” (놀아주는 것도 이정도로 하지, 친구.)
“They are innocent, Director. You know they are. You are the only one who can stop this madness. It’s not too late. Please, just—” (저분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국장님. 아시지 않습니까. 이 말도 안되는 일을 멈출 수 있는건 당신뿐입니다. 늦지 않았으니, 제발—)
가슴팍으로 예고 없이 날아든 거친 발길질에 리바이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잔기침을 뱉어내는 그의 흉부 위로 묵직한 군홧발이 올라 욱신거리는 곳을 짓눌렀다.
“It's none of my business about what you’ve been doing for the last couple of weeks, but the boys here have been starving for months.” (지난 몇주간 네가 뭘 하고 다녔는지 내 알바는 아니지만 여기 있는 친구들은 몇달간 굶은 상태라서 말이야.)
전술조끼 옆구리에 매달린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문 작전 국장은 분주해진 주변을 잠시 둘러보며 매캐한 연기를 느긋하게 흘려보냈다.
“I need to feed them a body or two to keep them happy.” (이 친구들을 만족스럽게 유지하려면 몸뚱이 두어개를 던져줘야 하거든.)
그가 무심하게 뱉은 침이 모래 위에 짓눌린 리바이의 축축한 뺨에 눌어붙었다. 제 발아래서 이를 뿌득 가는 리바이를 내려다보는 냉소 섞인 시선에는 일말의 인간성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Go to hell, asshole!” (지옥에나 떨어져, 개자식아!)
“Oh, I will. Don’t worry. But unfortunately…” (당연히 그럴 예정이야. 걱정 말라고. 그렇지만 운이 나쁘게도 말이지…)
작전 국장의 허벅지에 매여있던 권총은 익숙한 손길에 잡혀 묵직한 쇳소리를 냈다.
“I think you'll be there first. Warm my seat up for me, would you?” (네가 나보다 먼저 갈 것 같군. 내 자리 좀 뎁혀놓고 있어.)
담배를 입에 문 채 웅얼거리는 그의 입꼬리는 즐거운 듯 비죽 올라간 채였다. 제 미간에 겨눠진 총구의 침묵이 그리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걸, 리바이는 알고 있었다.
이제 곧 끝이 가까웠다. 최후의 순간까지 재수없는 면상을 노려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꾹 감긴 눈꺼풀 아래로 잭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른 모래만 스치는 바람에서 싱그러운 풀과 호수의 향기가 느껴졌다. 붉은 노을이 반짝이던 잭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던 꿈같은 순간을 떠올리자 오히려 마음이 따뜻했다. 제 손을 단단히 잡아주던 그의 강한 손길이 자신과 함께 하는 것만 같았다.
지구 반대편, 보잘 것 없는 이의 하찮은 죽음 따위는 잭에게 닿지 않을 터였다. 리바이 케인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도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빛을 발하며 우주로 날아 오르는 잭 하퍼 사령관의 멋진 미소가 반짝이며 머릿속에 그려졌다. 심장이 뜨겁게 타오르며 마지막이 될지 모를 심박으로 온 몸을 뒤흔들었다.
고마워요, 잭. 내 보잘 것 없는 인생에 잠시나마 당신의 빛이 스쳐서 행운이었어요. 앞으로는 상처 받지 말고, 아프지 말고, 나쁜 일에 휘말리지도 말고,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잭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에 끝을 맺기도 전, 천둥 같은 총성이 조용한 거리를 뒤흔들었다.
모래 알갱이들이 뒤통수를 파고들었다.
묵직하게 가슴팍을 짓누르던 무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단단히 감긴 눈꺼풀 너머로도 느껴지는 강한 빛이 어지러운 의식을 들쑤셨다.
… 죽은 걸까?
머릿속은 쿵쿵대는 심박과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다.
그제껏 꾹 감고 있던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눈이 멀게 밝은 빛이 각막을 긁었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구기고 고개를 돌리자 모래뿐인 바닥이 좁아진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강렬한 빛기둥에 제 주위만 낮처럼 밝았다.
이리저리 휘날리는 모래가 땀에 젖은 뺨이며 눈꺼풀에 들러붙었다.
방금 전까지 저를 내려다보던 작전부장은 머리통이 반쯤 날아간 채 쓰러져 있었다.
그제서야 주위를 감싸던 흐릿한 장막이 찢어진 것처럼 정신이 번뜩 들었다.
먹먹한 고막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던 소란스러운 주변의 소리가 한 번에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끄러운 헬기의 모터 아래로 느껴지는 강렬한 바람이 온 사방을 모래 구름으로 뒤덮었다.
어느 순간 제 주위로는 무수한 발소리와 다급한 외침이 가득했다.
팔을 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워준 누군가가 귓가에 무어라 소리쳤다.
여전히 현실감 없는 상황에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단어들은 제대로 의식에 닿지 않았다.
어느새 자유로워진 손목에는 피가 새어 나오는 집타이 모양의 상처가 깊게 남아있었다.
상처를 주무르자 뭄근한 통증과 함께 얼얼한 손끝에 피가 돌았다.
어깨를 두드린 사람이 또 다시 무어라 소리쳤으나, 이번에도 그의 외침은 리바이의 귓바퀴만 스쳐 지나갔다.
“Where’s…” (어디…)
여전히 제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이 멀도록 밝은 탐조등을 가리자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이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헬기 서너 대에서 내려오는 로터 바람이 정신없이 땅을 휘저어 사람들의 그림자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방금 전까지 근처에 잡혀있던 사만다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다.
“WHERE’S SISTER SAM?” (샘 자매님은 어디 계십니까?)
“ALL CIVILIANS’ ARE SAFE, SIR! PLEASE, CLIMB THE LADDER NOW! WE HAVE TO MOVE!” (모든 민간인들은 무사합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주십시오! 움직여야 합니다!)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헬기의 공중 사다리로 등이 떠밀렸다.
정부군이 늦지 않게 도착했다는 사실은 그제야 리바이의 온전한 주목을 받았다.
모든 민간인들이 안전하다 했으니, 샘도 다른 이들과 함께 구조되었을 터였다.
한 발 늦게 온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다시 저를 재촉하며 어깨를 두드리는 성급한 손길에 리바이는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얼얼한 뺨을 밀어 올려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몸놀림으로 제 손바닥 한 뼘만큼 얇은 공중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자 시끄러운 거리의 소란이 멀어지는 만큼 한 낮의 태양처럼 밝은 빛을 내리쬐는 헬기가 훌쩍 가까워졌다.
능숙한 조종 실력으로 공중에 고정된 리틀 버드 헬기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여러 사람들의 그림자로 가득했다. 탐조등 불빛에 그을린 망막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회복될 것 같았다. 유일하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부조종석에 더듬거리며 올라탄 리바이는 누군가 건네는 헤드셋을 받아 착용했다.
“Thank you, sir!” (감사합니다!)
리바이는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조종사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제야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조종사의 입술이 흐릿한 시야를 뚫고 그리운 모양새로 굽어지며 미소를 지었다.
— I reckon a proper greeting would come later. (제대로 된 인사는 나중에 해야겠네요.)
이젠 정말 온갖 곳에서 잭의 미소가 보이고 잭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 부은 눈두덩이며 뺨에 그의 시원한 손끝이 닿은 것도 같았는데, 여전히 탐조등이 긁은 자국만 번쩍이는 시선이 머릿속을 잔뜩 휘젓는 탓에 모든 게 그저 꿈만 같이 느껴졌다.
… 아까 정말로 죽은 거 아냐? 여긴 천국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리바이가 애꿎은 눈꺼풀만 짓누르며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하는 사이, 무전에 집중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조종사는 예고 없이 헬기를 반대로 돌려 여전히 하늘에 머무는 다른 헬기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 Everyone’s safe, so let’s take you to the base so the medics can take a look. It takes 18 minutes, so try to get some rest for now.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하니, 진찰을 받을 수 있게 본부로 돌아갑시다. 18분이면 도착하니까 지금은 좀 쉬세요.)
“O… Okay, sir. Thank you, sir.”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방으로 기운 헬기를 몰며 주머니를 뒤지던 조종사가 무언가 건네주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리바이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가벼운 물건을 쥐느라 조종사의 차가운 손끝이 리바이의 손가락 사이에 들어왔다 이내 빠져나갔다. 주먹 안에 남은 건 폭신폭신한 인이어 귀마개 한 쌍이었다.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나서 헤드셋 목에 걸어 내린 리바이는 조물거려 작아진 스펀지 조각을 귓속에 끼워 넣었다.
단단한 좌석에 등을 기대 누운 리바이는 섬광이 조금 잠잠해진 눈을 끔뻑이다가 조종에 집중하며 제게는 들리지 않는 통신을 전달하는 조종사를 슬쩍 흘겨봤다. 헬멧 바이저 아래로 드러난 옆모습의 그림자는 정말로 잭을 빼다 박은 것만 같았다. 조금 휘어진 콧대며 수염이 조금 자라난 남자다운 턱선이…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으려는걸 알아차린 리바이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눈을 꾹 감았다. 지금쯤 휴스턴에서 고된 훈련에 고생하고 있을 사람이 보이다니. 괜한 상념에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뿐이었다. 아침저녁으로 그를 생각하다 보니 능숙한 헬기 조종사에게서 그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게 분명했다.
우선 피로한 눈을 붙이고, 기지에 도착하면 다니엘에게 연락을 해야겠지. 다른 이들이 귀환하는 대로 수녀님들의 신변까지 확인하고 나서 씻고 한숨 푹 자야겠군. 나머지는 본토에 돌아가서 걱정해도 늦지 않겠지. 기지에 도착하면 질긴 스테이크라도 남는 게 있는 지 물어볼까…
손끝으로 피로한 눈꺼풀을 꾹꾹 누르며 생각을 정리하자 목덜미를 뻣뻣하게 굳히며 조금 남아있던 긴장도 서서히 풀어졌다. 버석한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달콤한 향기에 집중하던 리바이는 이내 짧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헬기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 순간 본능적으로 깊은 잠에서 퍼뜩 깨어난 리바이는 기체가 바닥에 붙기 무섭게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THANK YOU AGAIN, SIR!”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HEY, WAIT–” (이봐, 잠깐–)
“SORRY, I NEED TO MAKE A PHONE CALL! I’LL COME FIND YOU, ALRIGHT?” (죄송합니다. 전화를 걸어야 해서요! 곧 찾아 뵙겠습니다, 아시겠죠?)
짧은 감사 인사만 간신히 외친 그는 급히 임시 막사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미 마지막 인사를 전한 다니엘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제대로 된 통신도 없이 제 말만 믿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적인 도움의 손길을 건넨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수녀님들도, 모두 이미 명을 달리 했을터였다. 그의 도움 덕분에 모두가 안전하게 구조되었다 알려주면 그동안 마음 졸이던 그도 긴장을 풀 수 있을테지.
급하게 누군가 붙잡고 알아낸 공용 전화기로 달려간 리바이는 떨리는 손길로 제 머릿속에 새겨진 10자리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꾹꾹 눌렀다.
지난 일주일간 단 한 번도 두 번 이상 울리는 법이 없던 수신음이 벌써 네 번을 넘어가고 있었다.
부탁한대로 이미 휴대전화를 폐기한 걸까? 하지만 여전히 전화가 걸리는데… 혹시 모르니 사무실로 전화를 해야 할까?
언제부턴가 등 뒤로 가까워진 전화벨 소리가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만약 다크레이크가 이미 다니엘에게 손을 뻗었다면…
최악의 상황이 자꾸만 머릿속을 채웠다.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간절하게 틀어 쥔 리바이의 다리가 불안하게 덜덜 떨렸다.
— Levi. (리바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 그리운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불안하게 쿵쿵대다 턱 멈춰버린 심장이었다. 숨 쉬는 방법마저 잊은 듯, 완전히 작동을 멈춘 것만 같은 가슴팍을 틀어 잡은 손끝이 덜덜 떨렸다.
— I’m sorry, but Danny isn’t here. (미안하지만 대니는 지금 여기 없어요.)
매일 밤 꿈속에서만 듣던 것보다는 조금 거칠면서도 여전히 애정이 묻어나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휴스턴에 있어야 할 목소리는 귀에 바짝 붙인 수화기 보다도 어깨 너머에서 더 가깝게 들렸다.
“Jack…?” (잭…?)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는 리바이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덜덜 떨렸다.
여전히 모든 게 그저 꿈만 같았다. 눈을 몇번이고 깜빡여도 제 앞에 선 채 아름답게 미소 짓는 잭의 모습은 사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도 한참 수척해진 그는 비행복을 허리춤까지 내려 맨 채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차마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는 리바이의 앞으로 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 Are you going to come find me now, Levi? (이제 날 찾으러 올거에요, 리바이?)
머릿속이 몽롱하게 떠올라 숨을 쉬기 어려웠다. 힘이 빠진 제 손을 떠난 수화기가 바닥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소리를 낸 것도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뺨을 감싸자 지난 몇 달간 단 하루도 잊은 적 없는 온기가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휴대전화를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린 잭은 젖은 웃음을 터뜨리며 제 허리를 감아 당겼다. 둥글게 휘어진 그의 눈매가 축축했다. 잭의 달콤하고 짙은 체취가 코끝에 닿게 가까웠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그의 녹색 눈동자는 임시 막사의 온기 없는 파란색 LED 등불 아래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빛을 발했다.
오감을 통해 느껴지는 잭의 존재감은 아무리 확인해도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Am I dead? Is this… Am I in heaven right now?” (나 혹시 죽었나요? 지금 이건… 여긴 천국입니까?)
“You better not be, Levi.” (죽었으면 안 되죠, 리바이.)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제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린 잭의 뺨은 매일 저녁 그리워하던 호숫가의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등허리부터 몸을 타고 오르는 잭의 손길은 제 목덜미를 감아 은근하게 당겨 내렸다. 느리게 고개를 숙이자 달콤한 열기가 입술을 덮었다.
이대로 꿈에서 깨어나 버린다면 잭이 금방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불안감에 거친 입술만 붙인 채 잠시동안 떨리는 숨을 삼키던 리바이는 돌연 제 멱살을 잡은 잭의 거친 손길에 저항 없이휘둘렸다.
근처에 놓여있던 간이 의자가 발길에 차이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옆에 누운 리바이의 위로 보이는것 보다도 훨씬 가벼워진 잭의 온기가 올랐다.
당황해 놀란 숨을 터뜨리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겁게 젖은 혓바닥이 밀려들었다. 이빨이 부딪혀 찢어진 마른 입술에서 순식간에 퍼진 쇳내가 혓바닥을 가득 채우자 그제야 의식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잭 하퍼.
휴스턴에 있어야 할 그가 지금 제 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
“JACK!” (잭!!)
그제서야 잭을 단단히 감싸 안은 리바이는 눈물과 땀에 흠뻑 젖은 그의 뺨과 눈두덩이에 마구 입술을 붙였다. 입술과 뺨을 긁는 짧은 수염의 감각에 척추를 따라 전율이 타고 올랐다.
“Jack, oh my fucking god, Jack… It’s really you. You are here.” (잭, 세상에, 잭… 진짜 당신이군요. 당신이 여기 있어요.)
이마를 마주한 채 혼잣말을 훌쩍이는 리바이의 두 뺨을 단단히 감싸 쓰다듬은 잭은 축축하게 젖은 미소를 지으며 성치 않은 얼굴 구석구석을 응시했다.
“I’m here, Levi. I was…” (나 여기 있어요, 리바이. 난…)
여전히 부은 눈가며 뺨을 더듬는 차가운 손끝이 덜덜 떨렸다. 잭은 목구멍 끝까지 들어 찬 말들을 어느 하나 제대로 꺼내지 못하면서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 가득한 눈망울을 깜빡이던 속도가 느려지나 싶더니, 어느 순간 느슨하게 감긴 눈꺼풀과 함께 마치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그의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한달 반?만에 돌아온 리바이잭입니다 크흑 ㅜㅜ 중요한 순간 한달 잠수탄 시리즈... 잊지 않고 기다려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말씀 올립니다 ㅜㅠㅠ 이번 챕터 초반에 나오는 부분을 쓰는게 너무 힘든 탓에 어영부영 미루다 드디어 끝냈네요 !! 빨리 다음편도 후닥닥 낋여보겠습니다 헤헤 2주 정도면? 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잡담을 조금 하자면 요즘 올라오는 이터니티 젊은이도 멋있고 영감님도 맛있어서 진짜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후후.. 언능 이터니티도 보고 래리랑 영감 필모랑 붙여주고 싶은 욕망 가득입니다 :D...
재미있게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번 한주도 화이팅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