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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fe Space (3)

Published on March 4, 2026 by acorn_field

[The Gorge] Levi x [Oblivion] Jack :: 텟이 침공하지 않은 세계의 잭이 협곡에 가지 않은 리바이와 만나는 이야기


 

텔톰 필모 크오

[The Gorge] Levi x [Oblivion] Jack

 

 

 


 

그날 밤은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폭풍우가 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생존보다 작전이 우선이었다.

 

제 키의 몇 배는 되는 파도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사나운 바다는 일개 인간들에게 일말의 연민을 보이지 않았으나, 악착같이 스코프 너머의 타깃의 움직임에 집중하던 리바이는 완벽한 조준이 가능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불가능한 저격이 적중한 스코프 너머의 인물이 쓰러지는 걸 확인하자 순간적인 성취감이 온 몸을 감쌌다. 기지로의 안전한 귀환을 고대한 그가 제 옆에 있던 동료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마치 사진이라도 찍으려는 듯, 눈부시게 새하얀 번갯불이 세상을 밝혔다. 채 1초도 되지 않을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는 걸 인식할 틈도 없었다.

놀란 숨을 들이킨 리바이는 온 몸을 적신 한기가 바닷물인지 빗물인지, 자신이 흘린 식은땀인지 동료였던 자의 핏물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제 발아래로 방금 전까지 동료의 얼굴의 일부였던 살 조각이 자신이 격발했던 총탄의 탄피와 뒤엉켜 있었다. 

무어라 소리치는 다른 동료의 목소리는 뒤따른 폭풍우의 천둥소리에 휩쓸려 사라졌다. 

저격총을 집어 든 리바이는 총알이 날아든 방향을 향해 스코프를 향했으나, 두꺼운 빗줄기와 새까만 밤하늘만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리바이의 몸을 이리저리 울렁이게 만들었던 보트는 어느새 그를 단단히 지지하는 나무 바닥이 되어있었다. 

현실과 꿈, 상상과 기억 사이에서 불안한 숨을 헐떡이던 리바이의 얼굴 위로 돌풍과 함께 들어온 빗물이 한 움큼 쏟아졌다. 화들짝 놀라 활짝 열린 창문에서 한 걸음 떨어진 그는 주변을 빠르게 확인했다.

다시 세상을 밝힌 날카로운 번갯불은 피로 흥건한 오두막의 바닥을 드러냈다. 역한 피비린내가 가득한 그의 음울한 공간 한가운데서 주인을 잃은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에 자리 잡은 탄피가 어둑한 탁상등 빛에 번뜩였다. 

급한 호흡에 의식이 아찔하게 멀어졌다. 감각 없는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리자 두꺼운 비의 장막 너머로 잭의 오두막이 어렴풋이 보였다. 

스코프 너머로 십자선이 그려진 잭의 모습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호수를 가로질러 방아쇠를 당겼던 순간은 200번도 넘게 타인의 목숨을 목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던 모든 기억과 뒤섞여 리바이의 내장을 비틀었다.

익숙하게 어깨로 받아낸 소총의 반동. 스코프 너머의 핏빛 안개. 참았던 들숨에 뒤섞여 코끝을 스치는 화약의 단내. 짤랑이며 바닥을 튕기는 탄피. 완벽한 저격의 성취감—

목구멍을 치고 오르는 끔찍한 감각에 그제껏 들고있던 소총을 바닥으로 던치며 창틀을 잡아 간신히 휘청이는 몸을 지탱한 리바이는 고개를 숙인 채 헛구역질과 잔기침을 뱉어냈다. 뱃속이 쥐어 짜일때마다 눈앞이 아찔하게 멀어졌다가 이내 미지근한 눈물이 차올라 시야를 가렸다. 

지금 당장 잭이 괜찮은지 확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침대를 향해 급한 걸음을 한 리바이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근처 협탁에 올려놓았던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J, Jack? Are you there?” (재, 잭? 거기 있습니까?)

평소였다면 바로 대답이 돌아왔을 무전기는 지나치게 잠잠했다. 침대 옆에 웅크려 앉은 리바이는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꽉 잡은 무전기를 이마에 바짝 붙였다. 바닥에 눌어붙어있던 묵직한 죽음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올라 그를 뒤덮었다. 

“No, nonono… Jack? Fuck, Jack, please, come in. Over.” (아, 안돼… 잭? 젠장, 잭, 제발, 대답해 주십쇼. 오버.)

불안하게 고막을 쿵쿵대는 심박과 가쁜 숨소리만 가득한 의식이 아찔하게 멀어져 폭풍우의 소리는 그저 먹먹하게 들릴 뿐이었다. 

피냄새만 가득한 방구석에 자신을 가둔 리바이는 차마 창문 너머를 확인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젖은 날숨을 흐느끼며 몸을 잔뜩 웅크린 그가 무전기를 더욱 강하게 잡자 희게 질린 손끝이 덜덜 떨렸다. 

아니야. 아닐 거야. 설마. 잭. 안돼. 그럴 리가 없어…

호수와 오두막을 두드린 천둥은 열린 창문을 넘어 들어와 북받친 감정에 잠겨 무력하게 흐느끼는 몸을 뒤흔들었다. 끝없이 가빠지는 호흡과 심박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날카로운 한기에 그저 팔다리만 덜덜 떨며 웅크린 그는 제대로 된 생각을 떠올릴 수 조차 없었다.

스코프. 십자선. 목표. 거리. 풍향. 풍속. 움직임. 탄피. 호흡. 

계산한 경로를 정확하게 가로지르며 날아가 고통 없이 한 번에 생명을 끊어내는 총알.

짧으면서도 길기만 한 인생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끔찍한 저주가 되어 리바이의 영혼을 가장 깊고 차가운 지옥으로 끌어내렸다. 

어느 순간 그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한때 동료였던 고깃덩이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다음 순간 그는 피 칠갑이 된 오두막에 선 채 핏덩이 사이에 놓인 잭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기억인지 상상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기억들로 난잡하게 뒤덮힌, 남은 거라곤 그저 끝나지 않는 고통뿐인 의식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면…

 


시신경을 찌르는 섬광은 깊은 잠에 빠져있던 잭의 의식을 순간적으로 끌어올렸다. 창문을 휩쓰는 강한 바람과 굵은 빗줄기의 요란스러운 소음이 놀란 숨을 헐떡이며 오두막을 둘러보는 그를 반겼다. 제멋대로 펄떡이는 심장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하늘을 찢는 천둥소리가 오두막을 덜컹거리며 지천을 뒤흔들었다. 

덜덜 떨리는 얼얼한 손으로 주먹을 두어번 강하게 쥔 잭은 여전히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보트 모터를 고치며 무전을 나눴던 리바이가 흘러가는 말로 폭풍우가 올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던걸 떠올린 그는 다시 침대에 몸을 풀썩 눕히고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그러나 그의 작은 보금자리를 흔들며 고막을 파고드는 지구의 숨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한번 가빠진 심박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낮에 그의 공간을 방문했던 삼림 감시원들의 시선이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자신을 흘겨본 그들 중 한명은 비카나 줄리아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비웃음을 보냈던 것 같았다. 아니, 모든 감시원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친절했다. 그 중 한명은 자신의 딸 이야기를 하며 호의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 중 단 한명이라도 대중의 눈을 피해 산속 호숫가의 작은 오두막에 숨어있는 잭 하퍼에 대해 소문을 흘리기라도 한다면…

그런데, 모든 감시원들의 배지를 확인했던가?

 

망상이 깊어질수록 근거 없는 불안이 폐를 짓눌러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부족한 숨을 들이킬 때마다 심박이 박자에 어긋나게 꿀렁이는 통에 속이 울렁거렸다. 

목구멍까치 치솟은 헛구역질을 애써 삼켜 억누른 잭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대 옆 협탁에서 노란 처방 약 통을 꺼내 들었다. 작은 흰 알약 두 개를 그대로 삼킨 그는 그대로 침대에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단단히 틀어막았다. 

숫자를 세어 호흡을 늦추기 시작한 그는 오디세이 호의 외부 부품을 고치기 위해 우주복을 입은 채 우주선을 나섰던 순간 온 몸으로 느꼈던, 생명을 반기지 않는 우주 한복판의 절대적인 침묵을 떠올렸다. 인류의 가장 뛰어난 모든 기술의 집합체인 우주선에서 벗어난 작은 인간을 짓누르는 존재적 허무함은 재빠르게 그의 의식을 기어올랐다.

존재와 의식을 구성하는 모든 기억과 노력과 감정들이 한 줌의 재보다 못하게 느껴지는, 우주적인 공허함의 공포. 

잭이 그 공허함의 무게 아래서 진정안 평안을 찾은 것과는 달리 같은 공간을 공유한 다른 이들은 애써 그 공포를 외면했고, 그중 몇몇은 약물에 의존해 무뎌진 시공간을 살아가며 깨어있는 매 순간을 버텼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조용한 인생을 꿈꾸던 그 당시의 잭은 지구로 귀환하는 날을 고대하고 있었기에, 그 역설적인 평안함도 지휘관으로서 다른 이들을 이끌기 위한 자질 중 하나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어느 중력에도 종속되지 않은, 어두운 고독만이 가득한 텅 빈 공간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외부 수리를 마친 그가 오디세이 호로 다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본 우주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 

만약 그때 그 순간, 우주선과의 모든 연결을 끊고 행성간 공허에 제 몸을 맡겼다면 어땠을까. '잭 하퍼 사령관'은 인류의 과학적 진보를 위해 제 한 몸 희생한 인물 중 한명으로 기억되었겠지. 지구로 돌아온 '잭 하퍼'가 겪어야 했던, 평생 쌓아온 소중한 모든 것들이 제 눈앞에서 하나씩 부서져 내리는 끔찍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끈적하게 그의 의식을 기어 올라 목을 조르는 어두운 생각을 애써 무시한 그는 귀를 막은 손에 조금 더 힘을 넣고 상상 속 더 깊은 곳으로 조금씩 몽롱해지는 의식을 밀어 넣었다.

제대로 된 죽음도 맞이하지 못한, 한때 일개 인간이었던 먼지 조각은 평생 목적지 없이 천사나 악마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우주의 공허를 떠돌 터였다. 반짝이는 토성의 고리를 스쳐 지나며 태양계와 우리은하를 떠나는 그의 주위로는 닿을 듯 닿지 않는 수 많은 은하와 별과 초신성과 성운으로 가득했다. 먼지 속에서 탄생한 별이 제 주변을 맴도는 행성들을 정성들여 키우다가 결국 그들을 모두 집어삼키고, 최후의 순간에는 우주 그 어느 것 보다도 밝게 빛나며 명을 다하는 모든 장면들이 그의 눈꺼풀 뒤에서 영원한 찰나의 시간 동안 번쩍였다. 

 

조금씩 약 기운이 돌기 시작했는지, 공황 발작을 일으키던 망상이 사라진 자리로 호흡이 조금씩 제대로 돌아왔다. 

피로한 얼굴을 문지른 잭은 깊은 한숨을 흘리며 모로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의식을 가득 채우는 익숙한 무의 평안함에 집중하려던 순간, 문득 침구의 한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심장 한 구석에서 출처를 모르는 차가운 고독감이 비죽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호수에 도착한 이후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잭은 이혼 직후 느꼈던 외로운 감정의 이질적인 감각에 몸을 떨었다.

날이 안 좋아서 그런가. 낮에 다른 사람들을 봐서 그런 걸까…

몇분간 차가운 침구를 차내며 피로한 몸뚱아리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잠을 쫓던 그의 머릿속으로 새까만 상념들이 또 다시 슬금슬금 기어올라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미 정량을 넘게 털어 넣은 약을 더 먹어야 할지 고심하던 그는 문득 요란한 폭풍우 소리 사이로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 … shit, I can’t… Jack……

평소보다 시끄러운 잡음 사이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뒤섞인 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리바이?

곧바로 침대를 벗어나 책상까지 급한 발걸음을 한 잭은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봐도 리바이는 무전 송신 버튼을 도무지 놓으려 들지 않았다.

“Levi, come on, let me talk to you…” (리바이, 제발, 말 좀 할 수 있게 해줘요…)

무전기를 든 잭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초조하게 전면이 유리로 된 뒷문 근처를 서성였다. 잭과 리바이 사이의 광활한 공간을 가득 채운 굵은 빗줄기 때문에 호수 반대편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따금 번쩍이며 호수를 밝히는 번갯불만이 그의 오두막을 음울하게 드러냈다.

몇분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았으나, 희미하게 이어지는 억눌린 울음소리 사이로 잔기침과 헛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섞여들기 시작하자 조급한 마음에 무게가 더해졌다. 자신이 보내는 무전에 언제나 밝은 목소리로 반겨주던, 망원경 너머 리바이의 부드러운 미소가 눈앞을 아른거렸다.

하늘을 가르고 내려온 번개가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듯, 금세 뒤따른 사나운 천둥이 유리를 부수고 들어올 기세로 창문을 흔들었다.

헬기를 띄우는 것 조차 불가능한 날씨였다. 보트만 있었다면 사납게 출렁이는 호수를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텐데. 트라우마와 관련된 걸까? 어떻게든 그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잭은 언젠가 야간 산행을 할 요량으로 구매했던 고출력 손전등을 기억해냈다. 그게 다른 스포츠 용품들과 함께 보트 하우스에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잠옷으로 검은색의 얇은 티셔츠와 브리프만 입고 있던 그는 무전기를 속옷에 대충 끼워 넣고 옷장을 뒤졌다. 가벼운 비옷 겸 재킷을 꺼내 들어 재빠르게 입은 그는 맨발로 오두막을 나섰다.

눈앞의 시야까지 가리는 폭력적인 빗줄기를 헤치며 보트하우스를 향해 달리는 잭의 몸은 매 순간 방향을 바꾸는 폭풍우의 돌풍에 이리저리 휘청였다. 뒷마당 한 가운데로 날아든 두툼한 나뭇가지를 마지막 순간에 발견한 그가 멈칫한 순간 강풍이 그의 몸을 떠밀었다. 뾰족하게 꺾인 나뭇가지에 거칠게 다리를 긁히는 그 짧은 순간에도 제 품에 안긴 무전기가 걱정이었다. 몸을 잔뜩 숙인 채 낙법으로 젖은 잔디밭을 구른 잭은 빠르게 일어서서 절뚝이며 보트하우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급한 숨을 헐떡이며 빗물에 푹 젖은 재킷을 벗어던진 잭은 급한 손길로 무전기를 확인했다. 무전 소음과 함께 여전히 희미한 울음소리를 내보내고 있는 무전기는 물기만 조금 묻었을 뿐 멀쩡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터뜨린 잭은 빗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캐비넷 안쪽에 정리된 손전등을 집어 들었다. 손전등을 테스트하며 보트용 문의 버튼을 누르자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스프링이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거운 문을 들어 올렸다.

순간 하늘이 번쩍이자 매섭게 몰아치는 호수 너머 외로운 오두막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욱 거세지는 폭풍우는 자비없이 오두막을 뒤흔들었다. 숨을 고르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할수록 그의 비강을 가득 채운 피비린내만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결국 울렁이는 속을 참지 못한 리바이는 옆으로 몸을 숙여 위액을 간신히 토해냈다. 목구멍과 입안 전체에 들러 붙은 역한 감각에 잔기침으로 끈적한 타액을 뱉어내던 그는 더러워진 턱을 대충 팔로 닦아내며 급한 숨을 들이키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창문 반대편 벽을 밝히는 게 그저 번갯불 뿐이라 생각했으나, 뒤따르는 천둥이 부족했다. 

제멋대로 번쩍이는 날 선 번개 사이로 짧고 긴 패턴이 뒤섞인 불빛이 규칙적으로 벽을 밝혔다. 마치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리바이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자신을 위해 반짝이는 벽을 멍하니 응시했다.

 

·-··   ·   ···-   ··… P T T… O F F… K ……

 

빛에 담긴 모스 부호가 제멋대로 읽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PTT? 라디오 무전 버튼(Push-To-Talk)을 말하는 건가? 리바이는 덜덜 떨리는 손에 여전히 강하게 잡혀있는 무전기를 내려다봤다. 감각이 없는 손길로 무전기 송신 버튼을 지나치게 짓누른 탓인지, 송신 버튼이 눌린 상태로 끼어있었다.

순간 모든 걸 새하얗게 밝힌 번개를 곧바로 뒤따른 천둥이 하늘을 찢고 내려와 리바이의 정신을 흔들어 일깨웠다. 축축한 눈앞을 거칠게 닦아낸 그는 조금 뚜렷해진 시선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활짝 열려 덜컹거리는 창문으로 빗물이 한 주먹씩 후드득 쏟아져 들어왔다. 침대 옆 협탁에 그가 자기 전 놓아둔, 정량의 보드카가 담겨있던 유리컵은 산산조각이 난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그 위를 덮은 핏빛 발자국은 작은 오두막의 나무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살덩이나 눈동자, 탄피라고 생각했던 게 피에 뒤덮힌 부서진 유리 조각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만 몇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잭에게 실수로 스코프를 겨눈 이후로 총기와 탄창을 따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이후에나 간신히 떠올랐다.

 

LEVI – PTT – OFF – K (리바이 – 무전기 버튼 – 끄세요 – 오버)

 

그제서야 호수 반대편에서 날아든 모스 코드 메시지가 리바이의 정신을 꿰뚫고 지나갔다. 

“Jack? Is that you? Thank fucking God, I thought I… The button, fuck, it’s stuck. I, shit…” (잭? 잭입니까? 오, 씨발, 주여, 저는 제가… 버튼이, 젠장, 끼어서, 저는, 제기랄…)

욕설을 짓이긴 리바이는 안도의 울음이 뒤섞인 목소리 만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전 송신 버튼을 이리저리 문질러 짓눌린 구석을 빼내려 노력했다. 살아있는 잭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까지 뒤섞인 심박이 쿵쿵대느라 뒤죽박죽인 머릿속으로는 제대로 문장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잠시 무전기와 싸우던 리바이는 자유로워져 딸깍이는 무전 송신 버튼을 두어번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흘렸다. 

“Jack, come in, please. Over.” (잭, 대답하십쇼, 제발. 오버.)

볼품없이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무전을 보낸 리바이는 잭의 오두막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순간 발바닥에서부터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킨 그는 침대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큼지막한 유리컵의 잔해가 박혀 검붉은 피가 느릿하게 스며 나오는 발바닥을 확인한 그는 조용히 욕설을 짓이겼다.

— Levi, this is Jack. Is everything okay? Over. (리바이, 잭이에요. 괜찮아요? 오버.)

“Jack. Jack… You are here. Thank God. Haha… Thank you, Jack…” (잭. 잭… 여기 있었군요. 신이시여. 하하… 고마워요, 잭…)

이제야 잭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무전기를 얼굴에 바짝 붙여 혼잣말을 중얼거린 리바이는 실성한 사람처럼 훌쩍이며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폭풍우에 평소보다도 심한 잡음이 섞인 무전이었으나, 그 너머로 느껴지는 걱정 가득한 잭의 존재감이 불안한 심장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어느새 뺨을 축축하게 적시는 뜨거운 눈물을 대충 닦아낸 리바이는 두어번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고 나서 무전 전송 버튼을 눌렀다.

“Yeah, I’m… I’m okay. The storm—sometimes it triggers episodes. Bad ones. I thought I… I thought I hurt you when I didn’t hear you back. I didn’t know the button was stuck. I’m so sorry for waking you up, Jack. and…” (네, 저는… 괜찮습니다. 폭풍우가 칠때면 에피소드를 겪습니다. 특히 심한 것들로 말입니다. 잭이 대답을 해주지 않아서 저는 제가… 제가 당신을 다치게 한 줄 알았습니다. 무전 버튼이 끼어있는지 몰랐습니다. 주무시는데 깨워서 정말 죄송합니다, 잭. 그리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감정을 삼키며 눈을 감은 리바이는 바닥을 모르는 새까만 트라우마에 빠진 의식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끔찍한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진노하는 하늘이 번쩍이고 창문을 뒤흔들 때면 숨을 쉬는 것 조차 사치같이 느껴졌다.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며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관자놀이에 붙였다가도 겁쟁이처럼 꼬리를 말고 침대 구석으로 기어들었던 비참한 날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내 흩어져 사라졌다.

반짝이며 자신의 어두운 오두막을 밝히던 구원의 빛을, 호수 저 너머에서 자신을 걱정하며 아무런 기약 없이 손전등만 깜빡였을 잭을 생각하자 가슴 속부터 뜨거운 열기가 차올라 눈가를 따갑게 적셨다.

“Thank you for waking me up with your light. I don’t know what I would’ve done without you. Over.” (빛으로 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버.)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무전을 마친 리바이는 무전기를 든 채 그나마 성한 발에 무게를 실어 절뚝이며 욕실로 향했다. 작은 공간의 어둑한 불빛에도 눈앞이 아찔했다. 생각보다 피를 더 흘린 건지, 덜덜 떨리는 팔다리를 조금 움직이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선반에서 간신히 꺼낸 응급 처치 키트를 세면대 위에 대충 펼친 리바이는 핀셋을 알코올 거즈로 닦고 뚜껑을 닫은 변기 위에 자리를 잡았다.

— Please don’t be sorry, Levi. I was already up, but it took me a moment realizing you were talking on the radio. I’m just… happy to hear that you are okay. But, by the way, did you know… (미안해 하지 말아요, 리바이. 저도 이미 깨어있었는데, 무전이 오는걸 알아채는데 시간이 좀 걸렸네요. 그냥… 그쪽이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근데 혹시…)

이를 악물며 생살을 파고든 유리 조각을 제거할 때 마다 눈앞이 아찔해지고 식은땀이 목덜미를 적셨으나, 욕실을 울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리바이의 정신을 붙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살에 박힌 조각들은 힘줄이나 뼈는 건드리지 않은 것 같았다. 

— Did you know this is the first time you radio’d me first? Over. (그쪽에서 대화를 시작한게 이번이 처음이라는거 알고 있나요? 오버.)

수건을 한입 가득 문 채 상처를 벌리고 소독용 알코올을 쥐어 짜내느라 고통에 덜덜 떨던 리바이는 가벼운 웃음소리가 섞인 잭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잠시 얼어 붙었다.

잭의 목소리만 기다리며 묵직한 무전기를 항상 손이 닿을 거리에 두고 있는 게 무색하게도 리바이는 단 한 번도 먼저 무전을 보낸 적은 없었다. 이따금 그에게 먼저 무전을 보내려다가도 평화로운 순간을 보내는 그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발목을 붙잡힌 순간들은 손에 다 꼽지도 못했다. 그와 대화를 하고 싶은 제 욕심 따위가 잭의 일상에 끼어들어도 괜찮을 정도로 중요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 모든 상념과 억누른 진심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은 잭이 먼저 무전을 보내지 않으면 대화를 먼저 시작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는 무례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부끄러움과 불안함이 그의 목덜미를 기어올랐다. 

급하게 물고 있던 수건을 뱉어내 여전히 피가 꾸역꾸역 스며 나오는 발바닥을 짓누른 리바이는 무어라 대답해야 잭이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I, uh, I’m… I’m sorry, Jack. I never meant to be rude. I just… I just didn’t want to… bother you if you were having a peaceful moment. Over.” (저, 그, 죄송… 죄송합니다, 잭. 무례하게 굴려던 건 아닙니다. 혹시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면…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버.)

떨리는 목소리로 무전을 마친 리바이는 다시 수건을 집어 물었다. 재빠르게 발바닥 전체에 알코올을 뿌리자 다양한 상처의 크기만큼 크고 작은 통증이 쿵쿵대며 척추를 타고 올라 수건을 까득 문 그의 미간을 구겨지게 만들었다. 

— You don’t have to apologize, Levi. I was… in a bad place, mentally, when I heard your radio. You got me out of my own head. (사과할 필요 없어요, 리바이. 당신의 무전을 들었을 때에는 저도…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제 머릿속에서 꺼내주신거에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해하듯 조용히 무전을 보낸 잭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거즈로 덮은 발바닥을 붕대로 감는 리바이의 손이 조금 떨렸다. 

조금은 장난스럽고 한없이 다정한, 언제나 완벽하게만 보였던 잭에게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깊은 상처가 있었다 생각하니 쿵쿵 뛰는 심장이 미어지게 아파왔다. 트라우마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인간일 뿐이었으나, 그런 자신을 믿고 본인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공유해준 잭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호수를 넘어가 그를 감싸주고 싶었다. 

— … Please, feel free to radio me first whenever you want to talk. I mean it. I’m here for you, as much as you are here for me. Over. (… 부탁이니까, 대화하고 싶을때는 언제든지 먼저 무전 보내요. 당신이 저를 위해 여기 있는 만큼, 저도 당신을 위해 여기 있을테니까. 오버.)

무전기 너머로도 잭의 진심이 온전히 느껴져 쿵쿵대는 심장의 오래된 상처를 매만졌다. 온갖 통증과 감정들이 리바이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눈앞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자꾸만 축축해지는 눈을 깜빡일 때마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제멋대로 굴러 뺨을 적셨다. 

간신히 응급 처리를 끝내고 나서야 절뚝이는 걸음으로 침대로 돌아간 리바이는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사나운 폭풍우는 어느새 제법 잠잠해져 호수 위로 굵은 빗물만을 잔뜩 뿌려대고 있었다. 그가 목구멍에 걸린 뜨거운 진심을 몇번이고 삼켜내는 동안 잭은 인내심 있게 그를 기다려 주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평화로운 빗소리만 들으며 한참을 훌쩍이던 리바이는 제 얼굴에 반짝반짝 쏟아지는 불빛에 고개를 들었다. 

 

LEVI - ALL - OK

 

호수를 가로질러 넘어오는 메시지는 오랜 시간 부서지고 망가졌다 생각했던 영혼의 크고 작은 조각들을 다정하게 보듬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따스한 평안함에 눈물 젖은 웃음을 터뜨린 리바이는 축축한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무전기를 들었다. 

 

 


 

이번 편부터는 제가 망상한 리바이와 잭의 설정이 많이 나올 예정입니다 🤤 아무래도 잭은 텟에 붙잡혀 기억 리셋이나 무한복제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작 영화와는 다른 종류의 사건사고를 겪었다는 설정입니다. 디테일은 아마 다다음편 정도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리바이는 영화에서 조금 나왔던 트라우마 관련된 사건을 기반으로 이리저리 살을 붙여봤습니다. 영화에서 악몽때문에 유리잔 밟고 혼자 열심히 치료하던 리바이가 취향이라 그걸 그냥 통째로 넣었습니다 흑흑... 

필모크오 글인지라 너무 집착(?)하지 않고 스토리가 생각나는대로 느슨하고 즐겁게 쓰는 중이니 여러분들도 느긋하고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헤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룻맵!! 텔톰!! 리바이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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