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ype단편루스매브룻맵🐔🐺1838

16: Near Christmas

Published on March 5, 2026 by acorn_field

Near Christmas: 2040 즈음의 루스매브


 

 

 

 

 

 

 


 

성당 옆 공원에 간이로 설치된 크리스마스트리 판매점 간판은 이른 낮부터 크리스마스 전등에 휘감겨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곧 내릴 듯 묵직한 구름이 어둑하게 하늘을 덮은 덕분에 피트는 한 블록 밖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 간판을 찾을 수 있었다. 추수 감사절이 지나면 으레 찾아오는 연말의 기대감이 그의 주위를 감싼 침엽수의 깊은 향기에 크기를 더해가며 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판매대를 지나 공원으로 들어서자 넓은 공간 가득 멋지게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인파가 북적였다. 행복한 웃음소리와 들뜬 잡담 사이로 나무를 털거나 운반을 위해 묶는 기계들이 끊임없이 요란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금이라도 더 멋진 나무를 찾으려는 듯 이리저리 나무를 둘러보는 아버지와 아들 옆에는 뺨이 발갛게 얼은 아이에게 작은 침엽수 가지를 내어주며 행복하게 웃던 어머니가 무어라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전투기의 굉음과 망망대해의 파도 소리, 심박처럼 끝없이 울려 퍼지던 항공모함의 기계음에 익숙해져 있던 피트에게는 그의 주위를 감싼 모든 평화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졌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성인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에 걸린 이름표가 차갑게 피부를 파고들었다. 이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다. 긴장으로 굳어진 몸을 깨달은 순간,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판매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는 브래들리의 편지 내용을 기억한 그가 다른 정보는 하나도 없이 길을 나선 게 잘못이었다. 예정보다 며칠 일찍 파병을 마무리한 그는 브래드쇼 하우스로 돌아가던 길에 집 근처 성당의 크리스마스 트리 판매점을 보고 당연히 그곳일 거라 확신해버린 것이었다. 작은 동네도 아니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파는 곳이 여기뿐만이 아닌데도.

생각이란걸 좀 해라, 매버릭. 이제 와 자책해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미 괴로워지기 시작한 호흡에 현기증이 섞여 들었다.

 

기지를 떠날 때 근처에서 반전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보낸 경멸의 시선이 기억의 깊은 곳에서 기어올라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다른 이들의 주의를 끌지 않으려 몸을 굽힌 피트는 군화와 바닥에만 집중하며 출구를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집이 가깝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가 이미 글자 하나하나 모두 암기한 브래들리의 편지에서 아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며 지쳐도 즐겁다 했었다. 조종석을 떠난 피트가 마음을 놓고 평안을 찾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안식처一브래드쇼 하우스에 들어가 잠시 머리를 식히면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브래들리에게는 못난 꼴을 보이지 않을 터였다.

 

브래드쇼 하우스. 브래들리.

주위의 모든 것을 무시하고 그 따스한 온기를 떠올리기만 해도 긴장했던 가슴이 조금 편안해졌다.

 

덩치 큰 사내가 어깨 위로 나무를 올려 든 순간, 피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땅만 보며 힘차게 걷던 피트가 그와 부딪히고, 다음 순간 나무 한 그루와 두 남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Shit—fuck, I’m so sorry, sir! Are you okay? I didn’t see you walking by.” (헉, 젠장! 죄송합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지나가시는걸 못봤어요.)

당황하며 먼저 일어난 사내가 허둥지둥 사과하며 피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상치 못한 사고에 놀라 호흡이 가빠진 피트는 그와 시선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축축하게 번진 시야를 재킷 소매로 재빨리 닦아냈다.

“It’s, I’m okay. It’s my fault.” (이건, 괜찮습니다. 제 잘못이에요.)

“No, I’m sorry. I should’ve been more careful. Here, let’s get you up.” (아뇨, 제가 죄송해요. 더 조심했어야 됐는데. 자, 일어서는거 도와드릴게요.)

피트의 팔을 잡은 사내는 그의 몸을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큼지막한 손바닥이 휘청이는 허리를 든든히 받쳤다. 침엽수의 진한 향기와 은은한 애플 사이다 향 너머로, 익숙한 체향이 피트의 코끝을 간질였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고개를 든 피트의 눈앞에는 그가 지난 몇 달간 그리워하던 아이가 있었다.

“Maverick?” (매버릭?)

아이가 놀라 당황한 건 잠시였다.

“Mav!” (맵!)

재차 그의 이름을 외친 브래들리는 여전히 긴장으로 굳어있는 피트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Oh my god! I can’t believe this! Thought you’d be back next week!” (세상에! 믿기지기 않아요! 다음주에나 오실가리고 생각했는데!)

폐를 쥐어 짜내는 아이의 열정적인 환영에 긴장을 푼 피트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뺨에 닿는 브래들리의 목덜미에서 뜨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조종석을 떠난 뒤 처음으로 공중에 뜬 피트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비로소 실감했다.

아이의 체온을 들이마실 때마다 고조되는 감정을 간신히 삼키며 땅에 내려진 피트는 비로소 브래들리와 제대로 마주했다. 그는 나무 수액으로 약간 끈적거리는 브래들리의 재킷을 매만지며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아이의 모습을 훑었다.

“You got big, kid!” (많이 컸네, 키드!)

어깨와 팔을 주무르는 피트의 손길 아래, 두꺼운 재킷 너머로도 단단하게 근육이 들어찬 몸이 느껴졌다. 어느새 키에 걸맞게 근육이 붙은 덕분인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몇 인치는 더 커보였다.

“I’ve been big since junior high.” (고등학교때부터 컸거든요.)

장난스레 입술을 비죽거리며 피트의 손길을 쓸어내는 브래들리의 귓바퀴가 붉었다.

아차.

피트는 당황해 한 걸음 물러섰다. 벌써 훌륭한 어른이 됐는데도 또 주제넘게 아이 취급을 해버리다니. 부모님을 닮아 다정한 브래들리가 언제나처럼 눈치 없는 저를 이해해주기에 망정이지, 다른 누군가였다면 벌써 질려서 떠났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보호가 필요 없는 브래들리의 따스한 배려를 받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젠가 행복한 가족을 꾸리게 될 아이의 옆에 붙어 언제까지고 부담이 될 수는 없었다. 행복하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고르는 브래들리와 그의 가족들. 그 사이에 지난 세대의 쓸모없는 유물이 있을 자리는 없다. 그런 무거운 상념이 빠르게 머릿속을 채우자 잠시 밀려났던 날 선 불안감이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Hey.”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혀 다가온 건 미간을 조금 구긴 브래들리였다. 장갑을 벗은 큰 손의 온기가 차갑게 얼은 피트의 뺨을 녹였다.

“Is… everything okay, Mav? Did something happen? Is that why you are here early?” (괜찮아요, 맵? 무슨 일 있었어요? 그래서 일찍 돌아온거에요?)

걱정이 가득 담긴 헤이즐 눈동자가 피트의 심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당연하지 않은 너의 그 다정한 애정이 만료되기까지,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아이가 평생 알아서는 안 될, 끔찍한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 상처받은 영혼이 목구멍 깊숙이에서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I’m—” (나는—)

“Bradshaw! What’s taking so long? Are ya growing a tree there?” (브래드쇼! 뭐 이리 오래걸려! 나무 키워서 가져오게?)

판매대 근처에서 브래들리를 부르는 걸걸한 목소리가 피트의 말을 끊었다. 놀라 급히 숨을 들이쉰 피트는 브래들리의 손길에서 벗어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Shit, sorry! Coming!” (헉, 죄송해요! 지금 가요!)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만 하는 못난 모습을 드러낼 뻔했다는 걸 깨닫자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브래들리가 그 순간의 자신을 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Shit, uh…“ (젠장, 어...)

허둥거리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브래들리가 길 건너편의 작은 가게를 가리켰다.

”Right. There’s a small bakery across the street handing out hot apple cider for free for us. Would you get one for me? Take some sips, too. It’ll warm you up.” (맞다. 저기 길 건너에 작은 빵집이 있는데,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뜨거운 애플 사이다를 나눠 주시고 있어요. 제꺼 한 잔 받아줄래요? 몇입 마셔요. 몸을 좀 녹여줄거에요.)

“Sure thing, kid.” (물론이지, 키드.)

평소의 익숙한 미소를 되찾은 피트를 브래들리는 여전히 어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했다.재차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곧 가겠노라 대답한 아이는 바닥에 놓인, 9피트는 족히 넘어 보이는 두툼한 침엽수를 어깨 위로 솜씨 좋게 들어 올렸다.

“I’ll meet you there in few minutes!” (금방 갈테니까 거기서 뵈요!)

무겁지도 않은지, 나무를 짊어진 채 급한 걸음으로 판매대 쪽으로 향하는 브래들리의 뒷모습에는 그 자리에서 발을 때지 못한 피트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북적이는 인파와 높게 솟은 침엽수들 사이로 아이의 모습이 가려지고 나서야 피트는 길 건너편의 가게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Hope you are hungry, Mav. Lunch is on me. I’ve got the rest of the day off too.” (배고프셨으면 좋겠네요, 맵! 제가 점심 살게요. 오늘 나머지 일도 뺐어요.)

뜨거운 애플 사이다를 받은 피트가 창가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브래들리도 카페로 달려왔다. 자랑스레 그가 받은 두툼한 돈 봉투를 흔들어 보여주는 아이의 들뜬 목소리에 피트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There’s a new Italian restaurant nearby that everyone at the lot was talking about.” (근처에 새로 생긴 이탈리안 음식점이 있는데, 가판점 사람들 전부 거기 얘길 하더라구요.)

“Are you sure? I know you worked your ass off for that.” (진짜? 엄청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잖아.)

“Of course I’m sure! I’ve been wanting to take you some place nice for once with my hard earned money, Mav.” (당연히 진짜죠! 한번이라도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좋은 곳에 같이 가고 싶었어요, 맵.)

활짝 웃는 아이의 미소에는 피트가 사랑하는 모든 브래드쇼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아이 같아 보이는데, 또 그만큼 훌쩍 자라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또 얼마나 자라 있을까.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슴 깊이 묻어 둔 피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브래들리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소중했다. 자라는 아이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는 이미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은 거나 다름 없었다. 부모님을 닮아 상냥한 아이가 하루만이라도 더 오래 그 곁을 허락해주기를 바라는 수 밖에.

“You’re a good kid, Bradley. I’m proud of you.” (넌 참 좋은 아이야, 브래들리.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그의 모든 애정을 담은 피트의 칭찬에 뺨이 붉어진 아이는 대답 대신 헛기침을 하며 괜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Hmm, uh... Shall we head out, then?” (흠, 어... 갈까요, 그럼?)

머쓱해하면서 그에게 곁눈질을 하는 브래들리가 목덜미까지 붉어진 것을 본 피트는 숨기지 못한 웃음을 흘렸다.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에 직접 주면 받지 않을 용돈을 조금 더 넉넉히 넣어주리라,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Just a nice dinner, nothing more. Yeah?” (—그냥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어때?)

카운터 근처에서 들리는, 조용하면서도 어딘가 위협적인 목소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Look, I’ve told you many times that I’m not interested. I’ll have to call the cops if you keep come back here.” (저기요, 관심 없다고 몇번이나 말씀 드렸잖아요. 자꾸 이러시면 경찰을 부를 수 밖에 없어요.)

중년의 사장은 날 선 목소리로 카운터 앞에 선 사내에게 쏘아붙였다. 그저 사랑싸움으로 치부하기에 남자의 태도가 지나치게 공격적이었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사장의 손은 앞치마를 틀어 쥔 채 작게 떨리고 있었다. 친절하게 피트를 맞이해줬던 그녀는 애플 사이다를 내어주면서 브래들리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말을 걸어야 갰다고 생각한 피트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서자 브래들리 역시 똑같이 일어섰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아이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그대로 자리에 앉혔다.

“Stay here, kid.” (여기 앉아 있어, 키드)

“Mav.” (맵.)

“Bradley. I’m not asking.” (브래들리. 부탁하는 거 아니야.)

반항적인 시선을 보내던 브래들리는 단호한 피트의 눈빛에 순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길 아래 긴장해 굳었던 어깨도 느슨해졌다. 별일 없을 거라는 생각을 담아 애써 얇게 웃어 보인 피트는 아이의 어깨를 두어번 가볍게 두드린 뒤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밖에서도 풍기는 술 냄새가 피트의 예민한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Is there anything I can help you with, mister?“ (도와드릴게 있나요, 선생님?)

피트를 위아래로 훑어본 사내는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표정을 지었다.

”Fuck off. I’m talking to her.“ (꺼져. 저 사람이랑 얘기하고 있는거 안 보여?)

”She doesn’t seem to appreciate that. Did I read that right, Alice?“ (이분은 편해 보이지 않는데요. 맞나요, 앨리스?)

피트의 물음에 점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편으로 자리를 옮기며 불청객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난 사내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애써 친근한 미소를 지은 피트는 가게의 입구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Why don’t we step outside for a moment, buddy? I think you could use some fresh air.“ (같이 잠깐 밖에 나가는게 어때, 친구? 신선한 공기라도 쐬는게 좋을 것 같은데.)

”I'm not your fucking 'buddy,' motherfucker!“ (누가 씨발 니 친구야, 개새끼가!)

얼굴을 붉히며 화난 시선으로 피트를 노려보던 남자가 예고 없이 카운터 위에 올려져 있던 커피포트를 집어 들었다.

피트보다 조금 더 큰 남자의 손길이라면 뜨거운 내용물이 피트의 얼굴을 향할게 분명했으나, 그가 피한다면 자신의 뒤에서 놀란 숨을 터뜨린 주인에게 닿을 터였다. 자리를 지킨 피트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팔을 올려 얼굴을 막았다.

 

우당탕거리는 큰 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이 거의 동시에 작은 가게를 울렸다.

 

제 몸에 닿는 열기가 펄펄 끓는 커피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몇초가 걸렸다.

 

”—ah, shit. fuck! Are you... Are you okay, Mav?“ (—아, 씹, 젠장! 괜찮아요, 맵?)

”Bradley!“ (브래들리!)

그를 둘러 감싼 브래들리의 재킷 안에서 놀라 몸을 뗀 피트가 창백한 얼굴로 아이의 몸을 살폈다.

”Oh no, Bradley! Where?! Where did you get hurt?” (세상에, 브래들리! 어디야?! 어디 다쳤어?)

“Just, shit, my hand, I think.“ (그냥, 젠장, 손만 다친 것 같아요.)

커피포트는 카운터 뒤편으로 날아가 여전히 뜨거운 김이 나는 커피를 쏟아낸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브래들리의 재킷의 소매 아래로 드러난 큼지막한 손등에 빨갛게 데인 자국이 남아있었다. 남자가 내용물을 뿌리는 동시에 브래들리가 손으로 그걸 쳐냈으리라. 자칫 잘못 되었다면 브래들리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피트의 숨통을 틀어 쥐었다.

“Here, wrap it around your hand.“ (여기, 손에 두르렴.)

“Thank you. That feels better already. I don't think it's a bad burn.“ (감사해요. 벌써 괜찮아 진것 같은데요. 심하게 데인건 아닌가봐요.)

그 사이 빠르게 그들의 옆으로 다가온 사장이 건넨 차갑게 젖은 손수건을 받아 손에 두른 브래들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Fucking fags! You'd better—“ (좆같은 호모 자식들 같으니! 제대로—)

그의 위협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이들의 반응에 여전히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던 남자가 휘청이며 다가와 브래들리의 어깨를 잡았다.

마지막 비행 이후, 제멋대로 요동치던 감정의 기복으로 이미 팽팽해진 신경은 피트의 인내심을 빼앗아 갔다. 생명의 위험이 없는 이상, 어떤 이유에서든 민간인과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 갈 곳 없이 쌓여온 분노와 원한이, 고작 한 순간의 틈을 타 이성을 뚫고 나왔다.

“Keep your mouth shut if you want to keep your teeth.” (이빨 간수하고 싶으면 입 닫아.)

남자의 멱살을 움켜쥔 채 브래들리에게서 두어걸음 강하게 밀어낸 피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예상치 못한 위협적인 태도에 당황한 듯 얼어붙은 남자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단단한 근육으로 단련된 손에 붙잡혀 당황한 상대의 겁에 질린 눈빛을 마주한 건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주먹질을 한지 거의 반평생이 지났으나, 어딜 어떻게 때려야 전투기나 오토바이 조종에 지장이 없는지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남자의 얼굴에 박힐 듯한 힘이 실린 주먹을 재빨리 잡아챈 브래들리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Mav, Maverick. Let's go. It’s not worth it.” (맵, 매버릭. 그냥 가요. 이럴 가치도 없어요.)

“Move, kid.” (비켜, 키드.)

 

피트 평생에 브래들리에게 그리 사납게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분노로 차갑게 식은 시선은 집요하게도 여전히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더욱 가까이 다가온 브래들리는 피트의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Pete. Look at me.” (피트. 나 봐요.)

 

브래들리가 그렇게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피트에게 명령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 시야게 가득한 건 저를 달래려는 아이의 다정한 미소였다.

 

“I’m fine. Nobody’s hurt. This isn’t going to solve anything.” (전 괜찮아요. 아무도 안 다쳤어요. 이걸로 풀리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한 브래들리의 설득에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예전 언젠가, 구스도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깨진 유리병에 눈썹 아래가 찢어져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그를 그렇게 만든 이를 흠씬 두들겨주려던 자신을 막아선 그는 이런다고 영창밖에 더 가겠냐며 설득을 했었다.

 

“Could you let go of him, please?” (저 사람 놔줄 수 있어요? 부탁이에요.)

 

새로운 조종사를 찾아야하는 본인의 입장도 생각해달라며 여유롭게 농담까지 하던 구스와는 달리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러 애쓰는 브래들리의 얼굴에는 더 이상 숨기지 못한 긴장과 불안이 가득했다. 분노에 눈이 멀었던 피트는 제 주먹을 두른 아이의 손길이 살짝 떨리고 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 차렸다. 자신보다도 한참은 어린 브래들리 앞에서 무슨 꼴을 보인 걸까. 눈앞이 아찔했다.

 

“I’m… I’m sorry.” (미안... 미안하구나.)

 

그제서야 남자의 멱살을 놓은 피트는 속삭이듯 사과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더러운 살인자!

귓가를 울리는 시위대의 성난 목소리가 어쩐지 브래들리의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런 피트의 마음을 읽은 것일지, 그의 발걸음을 따르며 여전히 그의 손을 잡은 브래들리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It’s okay now. Let’s go home, please? I’m tired.” (이제 괜찮아요. 집에 갈까요? 저 피곤한데.)

 

굳은 피트의 어깨를 주무르는 브래들리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가게 안의 소란이 밖으로 새었는지, 그 사이 출동한 경찰관 두 명이 가게로 들어섰다. 도와줘서 고맙다며 나중에 꼭 들러달라던 점주의 적극적인 증언으로 두 사람은 아무런 문제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동료들에게 가게에서 있던 일을 전하겠다며 크리스마스트리 가판대에 얼굴만 비추고 오겠다는 브래들리의 말에, 피트는 그저 고개만 끄덕인 채 근처 가로수에 기대어 발밑을 노려봤다.

 

성인이 된 브래들리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걸로 모자라서, 조금 남아있었을지 모르는 브래들리의 믿음이나 존경심을 순간적인 감정에 동요되어 제 손으로 짓밟아 버리다니.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잔뜩 들러붙은 심장이 무거웠다.

평생 하늘을 가로지르며 언제까지고 젊을 거라 막연히 생각하던 피트도 40을 넘은게 몇년 전이었다. 동기의 아이들은 하나둘 사관학교에 입학하거나 일찌감치 파병을 나가기도 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브래들리도 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내년에 다시 준비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며 애써 밝은 얼굴로 명망 있는 주립 대학에 원서를 넣은 브래들리는 장학금까지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는 언제나 피트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듯 굴었다.

벌써 몇 년째 돌아오는, 단 하나의 부탁을 제외하면.

 

몇주뒤면 다시 맞이할 새해에 아이가 지난 몇 년간 정성스럽게 준비한 원서를 자신에게 건넬걸 알았다. 이번에는 될 거 같아요. 작년엔 그렇게 말했었지. 이번에도 자신의 방법이 들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니, 이번엔 자신이 아닌 다른 믿음직한 어른에게 부탁할게 분명했다.

원서가 다른 사람에 의해 제출된다면, 조금 더 적극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 캐롤과의 약속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고 군인으로서 짊어질 수 밖에 없는 모든 짐과 죽음의 그림자를 브래들리에게서 떼어놓을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비록 그 때문에 제가 가진 모든 걸 잃게 되더라도.

 

”Ma-v.”

어느새 그의 곁으로 돌아온 브래들리의 인기척에 피트의 고개가 올라갔다. 제 이름과 하품을 늘어지게 섞은 아이가 피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가볍게 기지개를 켠 브래들리는 자연스레 피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그들을 집 방향으로 이끌었다.

“Are you hungry right now?” (지금 배고파요?)

“Not really, but I thought you were.” (딱히, 네가 배고픈줄 알았는데.)

“What’d you say we get some rest before going out for early dinner? I could use some shower and a nap, honestly.” (집에서 쉬었다가 저녁 일찍 먹으러 가는거 어때요? 씻고 한 숨 자고 싶어서요.)

재차 하품을 뱉어낸 브래들리가 피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어릴적 피트가 한 팔로도 가볍게 안아 들 수 있었던 아이는 이제 제법 묵직하게 제 어깨에 무게를 실을 줄도 알았다.

“Sure, kid. That sounds good.” (그럼, 키드. 그렇게 하자.)

소중한 브래들리와의 외식을, 아직 가슴에 박힌 날카로운 감정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브래드쇼 하우스에서 두어시간을 보낸다면 그도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다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피트의 어깨에 팔을 두른 브래들리는 영양가 없는 가벼운 일상의 이야기를 전하며 두 사람을 집으로 이끌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재킷을 벗어 대충 식탁 의자에 걸어놓은 브래들리는 마치 곰이 포효하는 듯한 거한 하품을 내뱉으며 소파에 길게 뻗어버렸다.

“Go to your room if you’re going to take a nap, kid.” (잘거면 방에 들어가서 자, 키드.)

“Just need to lay down for a bit. My back is killing me right now. Lemme know when you’re done with the... shower…” (잠깐만 누울게요. 허리 아파 죽겠어요 진짜. 씻고 나서... 알려줘요...)

“Come on, kid. No sleeping on the couch!” (진찌 이러기야? 소파에서 자지 말라니까!)

옷걸이에 자신의 재킷과 두툼한 체크 셔츠를 벗어 단정히 걸어 놓은 피트는 대충 널브러진 브래들리의 운동화를 자신의 군화 옆에 정리하며 웃음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가 소파에 도착했을 때 브래들리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추운 날씨에 아침부터 몸을 혹사하는 일을 한데다 방금 전의 소란을 생각하면 아이가 피곤한 게 당연했다. 이대로 들어 방에 데려갈까 싶었으나 여기저기 나무 진액이 묻어 굳어있는 옷을 입은 채로 침구에 눕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만 재우고 나중에 깨우면 되겠지.

 

화장실로 향하는 대신 소파 옆 커피 테이블에 앉은 피트는 고요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봤다. 이제는 정말 구스를 닮아가는 아이의 얼굴에는 어느새 수염이 비죽 자라나 있었다. 그 아래로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자잘한 상처들과 긁힌 자국들이 가득했다. 이파리가 거친 나무들을 나르는 일을 하니 어쩔 수 없는 걸까. 괜히 마음이 미어졌다.

브래들리가 보낸 두툼한 편지에는 길지 않은 대학의 겨울 휴일 동안 단기로 나름 괜찮게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연말의 분위기를 느끼며 하루종일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도 모두 다 마음에 든다고 적혀 있었다.

 

아직은 여전히 한겨울의 냉기가 남은 뺨을 쓰다듬던 피트가 조심스럽게 아이의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냈다. 바닷바람에 상할지도 모르니 피트에게 립밤을 아침저녁으로 쓰라며 편지에서도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했는데, 정작 아이의 입술 구석은 말라 트거나 억지로 뜯어낸 상처가 남아있었다.

이것도 종일 밖에서 일해서 그런 걸까. 거친 입술이 잡다한 훈련과 비행으로 굳은살이 박인 피트의 손끝을 가볍게 긁었다.

건강히 돌아오라는 바람과 만나고 싶다는 진심이 담긴 그 소중한 편지에는, 몇 십 그루의 나무들을 들었다 내려놓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할 생각으로 행복한 가족들을 하루종일 마주하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차가운 집에 돌아오는게 얼마나 쓸쓸한지, 따위의 어리광은 부재했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만큼 빨리 제 갈 길을 찾아 나갔다면 좋겠다던 동기들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다른 이들 못지않게 그가 가진 모든 애정을 쏟아부은 브래들리가 조금 더 자라면 자신도 언젠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날마다 성장해가는 브래들리를 보면서도 아직은 그때가 아니거니 싶었다. 브래들리의 모습에서 앳된 아이의 흔적을 찾아낼 때마다 아이에게는 아직 자신이 필요하다는 이기적인 만족감이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길 아래 추위와 노동에 지쳐 기절하듯 잠에 빠진 브래들리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 그 사실이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피트의 심장을 짓눌렀다.

자신보다 큰 나무를 무리 없이 들어 올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브래들리의 모습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위험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망설임 없이 행동한 브래들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자신이나 상점의 주인이 큰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

 

반면, 자신은 어땠는가? 순간의 감정에 휘둘러 현실적으로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은 민간인의 멱살을 잡고 폭력을 휘두르려 하지 않았는가.

 

국내외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피트는 이미 이번 파병 도중 저지른 명령 불복종으로 상관들의 눈밖에 나 있었다. 비무장한 민간인에게 주먹이라도 휘둘렀다면 미 해군을 향한 언론과 대중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미 해군의 속죄양이 되어 불명예 전역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브래들리가 자신을 말리지 않았다면…

 

Pete. Look at me.

 

그의 주먹을 덮어 쥐고 이름을 부르던 브래들리의 낯선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목덜미에 소름이 올랐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이질적인 열기가 심장 깊은 곳에서 한꺼번에 솟아나 뱃속을 긁었다.

퍼뜩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 피트의 손목을 큰 손이 단단히 붙들었다.

“Mav.“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걸까. 그새 일어나 앉아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브래들리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기어코 브래들리를 화나게 만들었구나. 손목을 휘감은 손바닥이 뜨거웠다. 길길이 날뛰는 상관 앞에 불려가서 몇시간씩 훈계를 받을 때도 꿈쩍 않던 심장은 이미 제멋대로 불안하게 날뛰고 있었다.

“I’m… sorry, Bradley.“ (미안... 해, 브래들리.)

엉거주춤하게 선 피트는 차마 시선도 마주하지 못한 채 가빠진 숨을 헐떡이며 속삭이듯 사과의 말을 뱉어냈다. 뒤로 물러나려는 피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브래들리가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혔다.

“You know I’m an adult, don’t you?“ (저도 이제 어른이라는거 알고 계시죠?)

“I… I know, Bradley. I didn’t mean to…“ (알지, 브래들리. 그러려고 한건 아닌데...)

“Pete.“

또 다시 불린 이름이 피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브래들리의 눈동자에 형용하기 어려운 강렬한 감정이 일렁였다.

“You are back home a week early, but you have been upset ever since I saw you today.“ (집에 일주일이나 일찍 오셨으면서, 오늘 내내 기분 안 좋았죠.)

“I’m not—“ (그런거 아닌—)

“Yes, you are. You are upset right now.“ (기분 안 좋잖아요. 지금도.)

조심스럽게 피트의 뺨을 감싼 브래들리의 뜨거운 손길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물 속에 잠긴 듯,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얕아진 호흡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자신도 이유를 모를 눈물이 제멋대로 굴러내리자 그의 젖은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닦아준 브래들리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Could you please tell me what happened?“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시면 안돼요?)

그의 시선을 가득 채운 어둑한 눈동자 너머로 애써 잊으려 기억 속 저 멀리 묻어놓았던 조종석의 긴박한 미사일 경고음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살아남을 거라 믿었던 윙맨은 그의 눈앞에서 아내의 이름을 유언처럼 남겼고, 상관의 명령을 무시한 매버릭의 무리한 곡예비행은 그가 반년간 제 몸같이 다루던 호넷에 치명적인 기계적 결함을 일으켰다.

— 비행만 잘하면 뭐해! 명령 불복종을 밥 먹듯이 해대는 걸 어느 작전에 써먹어!

피트보다 몇 년은 어린 대령의 손등에 부어오른 오른뺨은 해군 사관학교 반지 크기만큼 그 안쪽 살이 터졌었다. 매일같이 불려가 분풀이 겸 받아야 했던 발길질은 아이스의 전화가 오고 나서야 멈췄다.

제대로 된 추모나 감정의 정리를 할 겨를도 없이 몇주간 이리저리 불려 다니다 쫓겨나듯 뭍으로 돌려보내진 그는 일찌감치 승인을 받았던 연말 휴가 대신 지구 반대편에 정박된 항공 모함으로 재파견될 예정이었다.

 

별 일 아니야. 난 괜찮아, 키드. 걱정 할 필요 없어. 그런__데 어쩌지. 사고를 쳐서, 이번 연말엔 같이 못 지낼 것 같네. 미안하다.

 

평소처럼 가볍게 웃으며 건네야 할 말들이 어느 단어 하나 제대로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심한 피트 미첼의 모습을 아이의 앞에서  더 이상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서도, 브래들리는 그만큼 더 가까이 다가왔다. 벽에 등이 닿아 더 도망가지 못하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커다란 손길이 죽죽 흐르는 눈물을 몇번이고 닦아냈다.

 

“I know you can’t tell me everything, but you can tell me that you are not okay.“ (전부 다 말 해주지 못하시는 건 알아요. 지금 당신이 괜찮지 않다는 말만이라도 해줄 수는 있잖아요.)

“No, Bradley, I can’t.“ (아니, 브래들리, 그렇게는 못 해.)

 

순수한 애정으로만 가득한 브래들리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기 힘들었다. 젖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돌린 피트는 한 손으로는 잡히지도 않는 브래들리의 손목을 잡아 밀어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 다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변성기도 맞지 못한 어린 나이었다. 평생 견고히 다져온 마음의 벽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넘어온 건 구스였다. 자신이 앗아간 구스의 빈 자리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브래드쇼를 위해, 피트는 이전보다도 더 단단하게 자신을 가둘 수 밖에 없었다. 타인과 온기를 섞으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뼛속 깊은 외로움이나 상처 따위야 조종간에 오를 때면 그의 생각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피트의 저항에도 굴하지 않은 브래들리는 몸을 더욱 가까이 붙였다. 축축해진 뺨을 감싸는 다정한 손길에 고개를 맡기자 맞닿은 이마 아래로 두 사람의 시선이 뒤얽혔다.

 

“Look at me, Pete. I'm here for you. You can lean on me. Let me take care of you.“ (날 좀 봐줘요, 피트.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나한테 기대요. 내가 돌봐줄게요.)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와 부딪히는 브래들리의 한결같은 애정에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봄의 햇살 같은 온기를 쫒아 상처 많은 영혼이 자꾸만 제 모습을 드러내려 목구멍을 긁으며 기어 올랐다.

 

“No matter what happens, I’ll be here for you, Pete. Trust me, please.“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옆에 있을게요, 피트. 믿어줘요, 제발.)

“Bradley…“

 

브래들리의 올곧은 시선은 끊임없이 눈물이 일렁이는 피트의 눈동자 아래서 요동치는 불안함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브래들리의 날렵한 콧대가 조금 굽어진 콧등을 쓸었다. 침엽수와 애플 사이다의 잔향이 섞인 뜨거운 숨결이 스쳤다. 차가운 벽과 뜨거운 브래들리 사이에 꼼짝없이 갇힌 피트의 몸이 덜덜 떨렸다.

 

“I love you. I love you with all my heart, Pete.“ (사랑해요. 제 온 마음을 다해서 당신을 사랑해요, 피트.)

 

감정에 잠겨 낮게 갈라진 브래들리의 속삭이는 고백이 피트의 척추를 따라 전율을 흘려보냈다. 긴장해 떨리는 손끝이 피트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옆구리까지 닿았다. 하루종일 거친 나무를 옳기던 큼지막한 손바닥이 닿은 허리가 타들어갈 듯 뜨거웠다. 어설픈 욕망이 묻어나는 서툰 손길로 전해지는 진심에 얼마 남지 않은 이성과 양심이 피트의 심장에 무겁게 달라붙었다.

 

별볼일 없는 나라도 모두 내어 주면, 너는 정말 내 곁을 떠나지 않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가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아직 어리기만 한 브래들리에게는 잠시 스쳐 가는 감정일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브래들리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게 아직 남아있다는 희망의 열기가 피트의 이성을 뒤덮었다. 버려지고 상처받을까 그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 없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나약한 희망이 목구멍으로 울컥 치솟았다. 젖은 숨을 간신히 삼켜낸 피트는 눈을 감고 그를 뒤덮은 뜨거운 열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피트는 제 뺨을 감은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그대로 브래들리의 두툼한 팔뚝을 따라 손길을 올렸다. 널찍한 날갯죽지에 손끝을 세운 피트가 고개를 조금 틀어 올렸다.

가까이 붙은 입술로 브래들리의 떨리는 날숨이 느껴졌다.

 

“Pete.“

 

닿을 듯 닿지 않은 입술 사이로 혀끝을 자극하는 뜨거운 속삭임이 터져나왔다. 브래들리는 성급하게 피트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 안았다. 온몸에 맞닿아 퍼지는 열기와 코끝을 간지럽히는 브래들리의 진한 체향이 피트의 떨리는 신경을 자극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곁을 지켜주겠다니. 아직 어리기 때문에 뱉을 수 있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잔혹한 약속에 불과했다. 브래들리의 나이의 두배만큼 더 살아온 피트는 그보다 더 많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트는 그 순수한 약속을 믿어보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걸 걸고서라도.

 

“I love you, Bradley.“ (사랑해, 브래들리.)

 

신중하게 내뱉은 고백은 그 어느 속삭임보다도 조용했다. 짧게 이어진 침묵에 혹여 듣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을 끝낸 건 브래들리의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손끝으로 느껴진 것 보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에 온 몸으로 뜨거운 전율이 흘렀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끝이 브래들리의 등을 긁었다. 낮게 목을 울린 브래들리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긴장한 듯 덜덜 떨리는 어리숙한 혀끝이 허락을 바라며 피트의 매끈한 입술을 핥았다.

 

마땅히 느껴야 할 무거운 죄책감 대신 고조되는 흥분이 피부를 기었다. 고개를 틀어 올린 피트는 뜨거운 혓를 얽고 제 작은 입안을 내어주었다. 뜨거운 신음을 헐떡인 브래들리는 성급하게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서툴게 이리저리 방황하는 살덩이의 뿌리를 뭉근히 누르며 고개를 반대로 돌리자 긴장해 굳은 혓바닥이 자리를 내어 주었다. 피트는 연한 내벽과 이를 능숙하게 쓰다듬으며, 뜨겁게 젖은 입안이 녹아내리도록 느리고 깊게 입을 맞추며 근육질의 등과 허리를 쓰다듬었다. 목을 긁어 내리는 거친 신음을 헐떡인 브래들리는 고개를 돌리며 한껏 달아오른 몸을 더욱 바짝 붙였다. 다시 제 입안을 가득 채운 두툼한 살덩이는 곧잘 제 입맞춤을 따라하며 이전보다 끈적하게 입천장을 훑었다.

 

“Maverick. Pete. I love you.“ (매버릭. 피트. 사랑해요.)

 

여전히 축축한 뺨에 몇번이고 입을 맞춘 브래들리는 그리 속삭이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어느새 셔츠를 파고든 뜨거운 손바닥이 항공 모함의 거친 바닷바람과 햇볕도 닿지 못한 맨살을 쓸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피트는 절박하게 아이에게 매달렸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혼란한 머릿속은 가진 줄도 몰랐던 배덕한 기대감과 굶주린 욕망으로 가득했다.

그제껏 꾹 감겨있던 눈꺼풀을 조금 밀어 올리자 그들의 머리 위에 매달린 겨우살이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 아래서 행복한 입맞춤을 나누던 구스와 캐롤, 그 옆에서 반짝이며 웃는 브래들리를 품에 안아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추었던 행복한 기억이 눈앞을 흐릿하게 일렁였다.

 

구스. 캐롤... 미안해.

 

찰나의 상념에 방황하던 피트는 등허리를 따라 청바지 아래로 들어온 뜨거운 손바닥에 둔부를 단단히 잡히고는 고개를 꺾어 올리며 열 오른 신음을 터뜨렸다.

 

“Brad, Bradley…“ (브래드, 브래들리…)

“Shh, it's okay, Pete. I'm here.“ (쉬, 괜찮아요, 피트. 저 여기 있어요.)

 

입술이 닿도록 가깝게 고개를 속인 브래들리의 낮은 목소리는 한껏 잠겨 갈라졌다. 그대로 입술을 덮어 문 그의 큼지막한 손길은 피트의 맨살을 끈적하게 오르내리며 숨기지 않은 뜨거운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너와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브래들리.

 

피트는 아이의 널찍한 등을 조금 더 끌어당기며 눈을 꾹 감았다. 눈을 깜빡일때마다 굴러 나온 뜨거운 눈물은 피트의 뺨을 적시고는 혓바닥이 뒤얽힌 채 열정적으로 숨을 나누는 입맞춤에 섞여들었다.

집 앞을 지나가는 차에서 흘러나온 크리스마스캐롤이 닫힌 문틈 너머로 흘러들었다가 이내 멀어졌다.

 

이번에는 같이 보내지 못할 크리스마스가 가까웠다.

 

 

 

 


2025.12 추가: 날씨가 쌀쌀해지니까 크리스마스 룻맵이 맛있네요 🤗 일본 루마랜드 이벤트에 참가할 생각으로 글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부분부분 수정할 곳이 많아 조금 뜯어고쳐봤습니다 🥰 작년에 봐주셨던 분들도, 이번에 처음 읽어주신 분들도, 모두모두 너무 감사드려요!! 남은 연말도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라며 💖🤩 내년에도 룻맵텔톰크오 사랑해주세요~!!


꺄우 오랜만이에요!!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뭐라도 써보고 싶어서 이틀만에 후딱 써본 2040 루스매브... 🥹 재미있게 읽어주섰다면 기뻐요!!

처음 사진은 얼마전에 들렀던 크리스마스트리 가판점이랍니다!! 단기로 일하시는 혈기왕성한 젊은 친구들은 하루종일 나무도 나르고 기계에 털었다가 꽁꽁 묶고 손님들 차 위에 묶어주는 일까지 하더라구요? 그래도 열심히 일한 만큼 일당에 팁까지 쏠쏠하게 받는다고 하니 모두가 행복한 연말 파트타임인거 같아서 어린 브래들리도 기회가 있었다면 분명 한번쯤 해봤을 것 같았어요!!

거기서부터 강렬한 룻맵의 향기를 맡고 만 전문 룻맵러... 처음엔 마피아신부au 프리퀄 정도의 단편을 쓸까 하다가 요샌 너무 au만 쓴것 같아서 ㅎㅎ 2040 룻맵으로 써봤습니다!

이 이후에 원서 문제로 관계가 박살나버려서 피트도 브래들리도 아주 맘고생 심하게 할걸 생각하면 그냥 가섬 박박 찢어져요 흑흑 그래도 원작에서 재혼(?)으로 이어줬으니 원작 이후 크리스마스엔 더 끈덕지게 붙어먹어야만....... 🥺💕 처음에 쓰려던건 조금 더 가벼운 내용이었던것 같은데 가끔 글을 쓰다보면 캐릭터들이 알아서 할걸 하는 느낌이라... 크게 안바꾸고 그대로 냅다 써봤습니다

 

마피아신부au 프리퀄이었다면... 평소엔 근처 정비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브래들리가 11월 말이면 피트가 속한 성당 옆에 자리잡는 크리스마스트리 가판점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쓰고 싶었어요!

날도 춥고 일도 쉽지 않으니 신부님은 하루 일과를 하시면서도 창문 밖으로 자꾸 훔쳐보고... 기회가 있을때마다 따뜻한 음료 들고나와서 브래들리 손 녹여줄거 같고 🥺 브래들리는 하루종일 맵 근처에서 일할수 있는데다 이따금 확인하러 성당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맵 손 마구 주무르고 뺨에 가져다 붙이면서 '오늘은 맵 손이 따뜻해서 좋아요~' 같은 늑대짓 할거같고 🤤 그러다가도 일 생기면 또 열심히 나무 옮겨 나르고... 맵한테 멋진 모습 보여준다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서 팁도 두둑하게 받을게 분명한 젊은피 브래들리...☺️

나쁜 마음 먹은 사람 차에 트리 올려주러 간 브래들리가 추행 당할 뻔한걸 피트가 보고 머리 끝까지 화나서 신의 말씀으로 아주 혼쭐을 내서 경찰서로 보내버리고🙏언제나 상냥하고 조용하던 피트가 목소리 올려서 화내는 모습에 또 다시 반하는 브래들리🥺

피트 늦게 끝나는 날에 가판점에서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다면서 제일 크고 멋있는 트리 공짜로 받아와서 집에 멋드러지게 장식할 생각에 신나있던 브래들리는 집까지 나무 들고와서 스탠드에 세워놓고 크리스마스 장식 상자 옆에서 피곤해 잠들어버리고... 나중에 집에 돌아온 신부님이 놀라서 깨우고 ㅋㅋ 그렇게 둘이서 행복하게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도 하고 맛있는거 나눠먹고~~~ 신부님 꿈에서 둘이 뽀뽀하고 브래들리 꿈애서는 🤤🤤🤤 마음껏 해줘~~ 하는 마음이었답니다!!

 

올 한해도 잊지 않고 룻맵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말씀 올리며🥹 내년에도 잘 부탁 드려요!! 내년에 텔톰 각각 the gorge랑 미임파8 나올걸 생각하면 벌써 군침이🤤☺🤤

룻맵 만세!!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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