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한 구원: 2
Published on March 5, 2026 by acorn_field
[마피아신부AU 루스매브] 브래들리와 루스터
The Betrayal
2003년 봄.
꽤 큰 폭풍우가 들이닥칠 예정이었다. 사장의 배려로 아르바이트를 일찍 끝내고 돌아온 집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 그 애가 구스의 아들이라는 것 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진실이니까 말이야.”
‘저녁에는 비프 스튜를 먹을까?’ 집에 평소보다 일찍 돌아올 거라던 매버릭은 그리 다정하게 물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려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성당에서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브래들리는 매버릭에게 우산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복이 비에 젖으면 곤란하시겠지. 며칠간 그의 뱃속을 짓누르던 애나폴리스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털어내며 우산 두 개를 집어든 브래들리는 지체 없이 성당으로 향했다.
한낮의 해를 두껍게 가린 폭풍운에 금세 밤처럼 어두워져서 그런지, 인적이 드문 성당은 스산하게 느껴졌다. 으르렁거리는 먼 폭풍의 천둥소리에 뒤섞여 텅 빈 복도를 울리는 반가운 매버릭의 목소리에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브래들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언제나 편하게 들락거리던 그의 사제실 문 밖에 선 채 잠시 얼어붙었다.
“브래들리가 모르게 그 애를 조종석에서 떨어뜨려 놓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걸세.”
부모님이—매버릭이—자랑스러워할 만한 해군 조종사가 되리라.
아주 먼 옛날부터 브래들리의 변하지 않는 꿈이었다.
그는 사관학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죄인처럼 침묵하던 매버릭을 생각했다. 실력이나 경험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조종사는 언제나 죽음에 가깝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매버릭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매버릭이 그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뿐인 지금의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며, 매버릭은 늘 자신을 믿어줬으니까.
“그러니 혹시라도 자네가 사관학교의 입학처에….”
아니, 자신을 믿어줬다고, 브래들리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믿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제실의 문을 열자, 책상 앞에 선 채 전화를 들고 있던 매버릭이 퍼뜩 놀라며 그를 돌아봤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매버릭?”
“브, 브래들리!”
창백해진 얼굴로 급히 수화기를 내려놓은 매버릭은 브래들리와 시선을 마주한 채 당황한 듯 뒷걸음질을 쳤다. 금세 벽에 등이 붙어 퇴로를 잃은 그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비현실적으로 무거웠다.
설마. 아니겠지. 오해일 거야. 조각난 신뢰 아래로 용암 같은 분노가 금방이라도 터져 올라올 듯 일렁였다.
“방금 하신 말, 진심이에요?”
“브래들리, 난, 나는….”
애나폴리스의 직인이 찍힌, 처참하게 구겨진 우편물이 매버릭의 손에 들려있었다.
며칠 전 체육관에서 우연히 엿들었던, 자신의 친구들에게 합격 통지서를 받았노라 자랑하던 이의 상기된 표정이 아른거렸다. 합격 통지서를 보여주면, 매버릭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걱정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해 주겠지. 덧없는 기대와 걱정을 하던 과거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그에게 보여주었어야 할 우편물을 요구하며 브래들리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몸을 숙이지 않고 내려다보는 매버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작게 느껴졌다. 지난 몇 년간 사관학교를 준비하며 몸을 키운 브래들리가 원한다면 무력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매버릭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편물을 조금 더 세게 틀어 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못 줘.”
“저한테 온 거잖아요. 주세요.”
“브래들리, 제발.”
마주한 시선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일렁였다. 이를 빠득 간 브래들리가 위협적으로 가까이 다가서며 우편물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그보다 빠르게 이를 등 뒤로 숨긴 매버릭의 다른 손이 브래들리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매버릭의 차가운 손끝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심박이 강하게 요동쳤다. 브래들리를 올려다보는 매버릭의 눈동자에 눈물이 일렁였다.
“매브는 항상 제가 조종사가 아닌 길을 걷길 원했다는 거 알아요. 위험하니까,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당신이 걱정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애정이 담긴 단순한 걱정 따위가 아니었다.
아버지 때문에, 매버릭은 브래들리가 조종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며 침묵한 브래들리의 시선이 창백해진 신부의 얼굴을 배회하는 사이 우산을 틀어 쥔 그의 주먹이 부들거렸다.
“저 모르게 제 꿈을 막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실 거라고요? 저도, 엄마도, 당신을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한테는 아니었나 보죠? 그럼 전 뭔데요, 죽은 친구의 불쌍한 아들?”
“아니야, 브래들리, 그럴 리가 없잖아. 진정하고….”
“닥쳐요!”
가슴팍에 올라간 신부의 손을 쳐낸 브래들리의 열 오른 호흡이 빠르게 가빠졌다.
드물게 비행이나 전투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매버릭의 녹안 너머에서 여전히 빛나던 그 뜨거운 열망을, 브래들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 아버지 때문에 더 이상 날지도 못하는데, 짐짝 같은 애새끼가 조종사니 뭐니 설치는 꼴이 보기 싫었나 보죠?”
“뭐, 뭐라고?”
내가 ‘구스’의 아들이라서.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매버릭은 여전히 해군 조종사였을 테고, 그가 사랑하는 하늘을 여전히 날고 있었을 테니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마음 한구석을 좀먹던, 자신의 것이 아닌 오래된 죄책감이 심연에서 기어올라 브래들리의 심장을 비참하게 비틀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매버릭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새 솟아오른 뜨거운 눈물이 브래들리의 눈앞을 일렁이다 이내 방울져 떨어졌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를 위로하려는 매버릭의 떨리는 손길이 그의 뺨에 와닿았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브래들리, 절대로.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난 정말 네가 걱정돼서—”
“닥치라고요!”
순간적으로 치솟는 분노에 신부의 손을 쳐내며 우산을 바닥으로 집어던진 브래들리는 그의 멱살을 세게 틀어 쥐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절제되지 않은 감정만큼 거친 손길에 미간을 구긴 신부의 잇새로 삼키지 못한 신음이 터졌다.
“왜 자꾸 거짓말만 하시는 거예요!”
비틀려 내려간 브래들리의 입꼬리 위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붙어 온몸으로 느껴지는 매버릭의 온기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그가 알고 있던, 그가 사랑하는 매버릭은, 결국 누구였던 걸까?
“방금 전화로는 그랬잖아요. 구스의 아들이니까, 어떻게 해서든 조종간에 태우지 않을 거라고. 합격한 사관학교도 못 가게 할 셈이었잖아요. 아니에요?”
“그건….”
브래들리와 벽 사이에 짓눌린 채 숨을 몰아쉬던 매버릭은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린 그는 젖은 한숨을 내뱉었다. 침묵이 또다시 무겁게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그가 죽여 묻어야만 했던, 평생 자신의 손에 닿지 못할 신부를 향한 배덕한 욕망의 조각이 비죽 고개를 들었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죄악으로 낙인찍으며 인고해야만 했던, 원할 수 없는 이를 원하는 심장을 찢는 고통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바짝 붙은 브래들리의 열 오른 날숨에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뭉쳐진 신부의 속눈썹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신부의 얼굴을 이리 가까이서 본것은,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용암같이 뜨겁게 그의 뱃속을 뒤트는 분노에 뒤섞인 비뚤어진 욕망이 브래들리의 심박에 열기를 더했다.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가까이하자 젖은 숨을 터뜨린 신부가 놀란 눈으로 브래들리를 올려다봤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녹색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제는…. 당신이 날 원망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브래들리….”
코끝이 닿아 두 사람 분의 가쁜 숨이 얽혔다. 신부가 진심으로 자신을 밀어낸다고 하더라도…. 브래들리는 자신의 손에 잡힌 그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전율에 뒤틀린 욕망의 열기가 브래들리의 피부 아래를 기었으나, 이내 고개를 든 무거운 죄악감이 순간적으로 그의 심장을 조였다.
브래들리의 떨리는 날숨과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로 흐른 눈물 두어 방울이 신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브래드, 안돼….”
가쁜 숨에 뒤섞여 차마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속삭임에 신부의 부드러운 온기와 달콤한 날숨이 닿을 듯 가까웠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신부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신부의 성직복을 쥔 손에 힘을 푼 브래들리는 눈을 감으며 신부에게 입을 맞췄다. 신부의 손이 브래들리의 가슴팍 위로 붙었으나, 덜덜 떨리는 손길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붙인,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입맞춤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브래들리의 목을 조였다. 순간적으로 아찔해진 머릿속엔 그가 평생을 갈구하던 피트 미첼의 향기가 가득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혹여 깨져 사라질까 차마 움직이지도 못한 채, 앞으로 다신 마주하지 못할 신부의 온기를 느끼던 브래들리의 잇새로 참지 못한 울음이 날숨에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내뱉은 신부의 손안에서 우편물이 작게 바스락거렸다.
브래들리는 자신의 가슴에 올려진 신부의 손을 덮어 쥐었다. 이제는 작게만 느껴지는 그의 차가운 손이 브래들리의 손안에 꼭 맞게 들어왔다.
신부에게 브래들리 브래드쇼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사제로서 책임감으로 차마 저버리지 못한 불쌍한 고아? 자신을 하늘에서 끌어내린 친구의 아들?
그 오랜 시간 자신의 곁을 지켜주며 사랑한다 말해주던 따스한 애정은, 모두 거짓말이었을까?
목적도 의미도 모두 사라진 인생에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힘이 빠진 신부의 손에서 어렵지 않게 자신의 우편물을 빼앗아 든 브래들리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제껏 감겨 있던 눈을 뜬 신부가 불안한 시선으로 조금씩 멀어지는 브래들리를 응시했다.
“…. 전 애나폴리스에 가서 조종사가 될거에요.”
“브래들리, 제발….”
“다신 볼 일 없을 겁니다.”
“가지 마. 부탁이야.”
진심으로만 느껴지는 신부의 애원도, 모두 거짓말이겠지. 평생을 사랑한 이에게 난도질당한 심장이 아프게 펄떡였다.
어느새 가까워진 폭풍우가 으르렁거리며 성당의 창문을 덜컥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늘 그러하듯, 평소보다도 심하게 다리를 절뚝인 신부가 브래들리에게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저 매버릭의 손을 잡고 그의 거짓 애정이라도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이 브래들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닿을 듯 가까워진 신부의 손길을, 브래들리는 끝내 잡지 않았다.
“Goodbye, Father.” (잘 있어요, 신부님)
“No, BRADLEY!” (안돼, 브래들리!)
목구멍을 틀어막은 뜨거운 감정에 들리지 않을 듯 마지막 인사를 남긴 브래들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바깥을 향해 달렸다. 조용한 복도를 울리며 그를 뒤쫓는 신부의 절뚝이는 걸음과 그를 향하는 부름에도, 브래들리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폭풍우가 시작된 어두운 오후의 거리는 인적이 드물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채 더러운 뒷골목에서 덜덜 떨고 있던 그에게 혼자인지 묻는, 강한 외국의 악센트가 뒤섞인 이방인의 질문과 다정하게 건네진 따뜻한 음료의 불안한 온기는 루스터의 머릿속에 남은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블러드던이 당신을 배신했어.”
방아쇠를 당기던 루스터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뒤통수에 닿은 총구의 미세한 압력 변화를 알아차린 정보국 요원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미국이나 유럽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게 동부 항구에서 밀반입이나 관리하라고 시키던 파칸[6] 이바노프가, 왜 이제 와서 당신을 직접 샌디에이고로 보내서 피비린내 나는 더러운 일들만 잔뜩 맡기는지 궁금하지 않아?”
“…용건만 간단하게 말해.”
권총을 그러쥔 루스터가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뒤통수에 총구를 짓눌렀다.
“넌 그냥 파칸이 버리는 패일 뿐이야. 희생양이지. 미국이랑 평화 협정을 원하는 소련 지도부가 KGB를 써서 블러드던을 압박하고 있거든. 너랑 네 친구들이 표면에 드러날 정도로 활동하게 만들어 아예 잘라내려는 거지. 최근 동유럽 정세 때문에 소련 지도부가 조금 급한 것 같거든.”
“왜 날….”
“당신, 미국인이잖아?”
“….”
“소련인도 아닌 당신이 블러드던 크리샤까지 간 것부터가 대단하긴 하지만…. 뭐 거기까지라는 거지. 사실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아? 블러드던 소비에트닉[7]들이 외국인을 못 믿는 거. 설마 그 외국인 혐오자들이 진심으로 널 진짜 ‘형제’라 받아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애써 무시하던 그를 향한 몇몇 지도부 형제들의 차가운 눈빛이 루스터의 등골을 기어올랐다.
불법 싸움판에 강제로 던져져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그가 마지막 발악으로 그 생지옥에서 탈출하려다 잡혔을 때, 그런 그를 죽이지 않고 블러드던의 일원으로 받아주며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를 준 것은 처음부터 그를 눈여겨 보던 아브토리테트[8] 세르게이였다. 미국인인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준 그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으려 혹독하게 노력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머릿속 뒤편에서 아른거렸다.
악착같이 러시아어를 배우고, 시키는 일은 아무런 불만 없이 해내며 세르게이의 위상을 높였으나, 그런 루스터에게 주어지는 것은 항상 다른 이들보다 적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나를 증명하면. 언제라도 버려질 패처럼 쓰여지면서도, 갈 곳 없는 원망의 화살을 언제나 스스로를 향했다.
언제나 따스하기만 하던 샌디에이고와 매버릭의 온기를 잊으려 노력할수록,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이국땅의 한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외로움으로 루스터의 영혼을 짓눌렀다. 참다못해 손을 댄 약물이나 타인과의 하룻밤도, 순간의 쾌락이 지나고 나면 더욱 무거운 무력감이 되어 그의 목을 조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루스터는 블러드던과 형제들을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라 여기며 모든 것을 바쳤건만….
“내 이름은 나타샤 트레이스야. 약혼자도 있고, 이번 가을에 결혼할 예정이야. 요즘엔 계속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내일 저녁에는 오랜만에 스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할 거야.”
“하.”
씨발. 입꼬리를 비죽 올린 루스터가 권총을 재차 틀어쥐었다. 고깃덩이에 이름표가 붙는 순간 방아쇠는 한없이 무거워졌다. 쓸데없는 상념에 사로잡혀 망설인 그 짧은 순간은 그녀가 루스터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를 간 루스터는 그녀의 뒤통수에 총구를 조금 더 들이밀었다.
“…. 소련 지도부 압박 때문에 블러드던이 나를 미정부에 바치려고 한다는 건가?”
“너랑, 아마도 최근에 미국으로 넘어온 다른 보예비크들. 블러드던은 만성적으로 저생산 저소비에 허덕이는 소련 지도부의 지하 자금줄이라, 그쪽 정보국에서 불법행위도 눈 감아주고 사업 확장에 필요한 건 아낌없이 지원해줬지. 몇 년 전 겨울에 시베리아에서 훈련받은 적 있지? 귀환 헬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육로로 귀환하다 두 명이 동사했던 동계 훈련.”
“그걸 어떻게….”
“그거, KGB 특수 요원 극비 동계 훈련 프로그램 시나리오 중에 하나야. 이걸 치우면 전부 다 알려주지.”
머리 위로 들고 있던 손으로 뒤통수에 바짝 붙은 권총을 가리킨 그녀는 피가 섞인 침을 뱉어냈다.
“이것 봐, 루스터. 우리가 원했다면 너랑 네 보예비크 친구들은 이미 붙잡혀서 취조당하고 있을 거야. 그 대신 우린 별거 건지지도 못하겠지. 브라트바 입 무거운 거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감시차 보냈던 요원이 며칠 뒤에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송장이 되어서 돌아왔는데, 왜 내가 죽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혼자서 널 만나려고 했다고 생각해?”
확실히, 루스터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이 만난 사막 한가운데의 버려진 주유소 건물 주위에 숨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필요한 정보만 얻고 죽여도 상관없겠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며 귀를 바짝 세운 루스터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리며 총구를 내렸다. 긴장이 조금 풀린 탓인지, 그녀와 난투전을 벌이며 강하게 얻어맞은 옆구리에서 뭉근한 통증이 올라왔다.
“블러드던에서 내 정보를 그쪽한테 보낸 건가?”
“지난주 KGB에서 공식 채널을 통해 너와 다른 보예비크들 정보를 보냈어. 정작 우리가 원하던 마약 밀반입 운반책 관련 정보는 완전히 배제하고 말이야. 누가 봐도 대충 그럴듯해 보이는 미끼를 던져서 미-소 정보국의 연합 작전으로 국제적인 범죄 그룹을 잡고, 야당이 원하는 대로 평화 협정 방향으로 여론을 돌리려는 생각이지. 소련 정보국은 블러드던을 아예 꿀꺽하고 싶은 생각이지만.”
“그건 소련에서 블러드던 전체를 배신하려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아.”
루스터를 향해 몸을 돌린 채 뻐근한 어깻죽지와 팔을 주무르며 말을 잇던 그녀는 재차 핏물 섞인 타액을 뱉었다.
“극비사항이지만, 우리가 입수한 인텔에 의하면 아마 늦어도 다음 주면 KGB는 소련 내 블러드던 사냥을 시작할 거야. 그리고 손이 닿는 대로 자신들과 관련된 증거를 말살시키겠지. 문서, 건물, 사람, 가리지 않고.”
“나한테 그걸 다 말해주는 이유는?”
“미국 내에서 활동 중인 블러드던 정보가 필요해. 그들이 소련 지도부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다는 증거가 사라지기 전에 말이야. 미정부는 소련 지도부와 KGB가 적극적으로 블러드던을 통해 미국 내에서 불법 활동을 저지르고 자금을 모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해. 특히 미국 내 마약 사건 급증과 관련해서. 냉전에 지친 국민들이 평화 협정을 지지하는 야당에 힘을 실어주기 전에, 미정부는 그런 범죄자들이랑은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없다는 공식 발표가 필요하거든.”
망가진 주유 펌프에 기대어 말을 잇던 요원은 느릿한 걸음으로 루스터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의 태도에서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가 든 총구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향했다. 시선을 마주한 채 한 손을 위로 든 그녀는 다른 손으로 자신의 정장 자켓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무슨 이유로 네가 브라트바에 들어갔든, 무슨 짓을 저질렀든, 우리와 일하게 된다면 네가 소련으로 건너가기 전의 삶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줄게.”
루스터에게 바짝 다가선 그녀의 가슴 위로 총구가 파고들었다. 심장을 겨냥한 권총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선 그녀는 언뜻 보면 그저 종이쓰레기처럼 보이는 작은 노트 조각을 꺼내 보였다.
“네 그 잘난 러시안 형제들이랑 같이 사이좋게 시베리아 감옥에 쳐박혀서 평생 강제노동만 하다가 비참하게 뒤지든가, 아니면 미정부를 도와서 네 고향에 다시 자리를 잡든가.”
루스터의 자켓의 가슴 포켓에 종이조각을 밀어 넣은 그녀는 그대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The choice is yours.” (선택은 네 몫이야.)
루스터의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지체 없이 몸을 돌린 그녀는 루스터에게 등을 보인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던 오토바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의 붉은빛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깊은 숨을 내뱉은 루스터는 그제야 권총을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담배를 꺼내 물며 밤하늘을 응시하는 루스터의 목덜미로 해가 진 쌀쌀한 사막의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 따스한 캘리포니아의 바닷바람과 신부의 애정 어린 손길의 기억이 루스터의 뺨을 아른거렸다.
[6] 파칸(Пахан): 브라트바의 우두머리.
[7] 소비에트닉(Советник): 파칸의 카운슬러 또는 고문. 전략적 조언을 제공하고 파칸의 의사 결정에 도움을 줌.
[8] 아브토리테트(Авторитет): 브라트바 내에서 조직 내 여단(brigade/bratva)의 리더.
이번편은 조금 짧아서 조금 일찍 올려봅니다 :)
서사충 나름의 노력으로 최대한 뒷이야기를 줄이고 줄이다보니 노잼...이거나.... 엄청나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죄송합니다 꾸벅... 그래도 담편은 조금 더 재미(??) 있을지도!!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룻맵 만세! 더운 날씨 모두들 건강하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