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fe Space (12)
Published on March 4, 2026 by acorn_field
[The Gorge] Levi x [Oblivion] Jack :: 텟이 침공하지 않은 세계의 잭이 협곡에 가지 않은 리바이와 만나는 이야기
텔톰 필모 크오
[The Gorge] Levi x [Oblivion] Jack
** 주의: 😥
깨끗한 리바이의 옷을 입고 두툼한 담요를 두른 잭은 애디론댁 의자 깊숙이 자리 잡은 리바이의 품에 안긴 채 밤이 깊어지는 조용한 호수를 감상했다.
귓가에 규칙적으로 내려앉는 평화로운 날숨과 제 허리를 두른 단단한 팔뚝의 열기는 강렬한 정사 이후 은은하게 가라앉은 잭의 심박을 뭉근히 간지럽혔다. 피부 아래로 끊임없이 기어 오르는 온기에 깊은 날숨을 흘리며 만족한 고양이처럼 리바이의 어깨에 뒤통수를 문지른 잭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리바이의 손등과 팔뚝에 남은 제 손톱자국을 살살 쓸었다.
“Are you ready for bed?” (주무실래요?)
부드럽게 웃으며 허리를 감은 손길에 힘을 더한 리바이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시선으로 잭의 얼굴을 구석구석 응시했다.
“No, not yet. Can we stay out for a bit longer?” (아뇨, 아직이요. 조금만 더 밖에 있으면 안될까요?)
“Of course, Jack. We can stay as long as you want.” (당연히 되죠, 잭. 당신이 원하는 만큼 밖에 있어도 돼요.)
이마에 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떼어 넘겨준 그가 하루치의 수염이 까슬하게 오른 제 뺨에 입술을 쪽쪽 붙이자 콧수염이 피부를 가볍게 간지럽혔다. 어깨를 움츠려 작게 낄낄거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잭은 리바이가 장난스레 웃으며 집요하게 제 목덜미에 약하게 이를 세우기 시작하자 결국 헐떡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까슬까슬한 턱을 밀어냈다.
“It’s ticklish.” (간지러워요.)
“Sorry. It’s just hard to believe you are real.” (미안해요. 당신이 진짜라는게 믿기지가 않아서.)
그제서야 잭의 달아 오른 피부에 입술을 붙이는 일을 그만둔 리바이는 눈썹을 한껏 내리며 잭의 손을 잡아 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모든 행동과 말에서 느껴지는 한없이 깊고 뜨거운 애정에 뺨이 달아올랐다.
“I’m as real as you are, silly.” (나도 당신만큼 진짜 맞거든요. 시시하긴.)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린 잭은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그의 콧방울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마주한 시선에 열기가 일렁이는 듯싶더니, 입술을 벌려 잭의 손끝을 문 리바이는 가볍게 이를 세우며 손가락 배를 정성스레 핥았다.
신경 말단에서부터 척추까지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축축한 열기에 열뜬 날숨이 흘러나왔다.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뭉근한 복통과 온 몸을 두드리는 근육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오늘 밤은 더 이상 제대로 세우지도 못할 걸 알면서도 괜히 아랫배가 당겼다.
느슨한 미소를 지은 잭이 리바이의 콧수염을 살살 쓰다듬으며 그의 입술을 응시하자 자연스레 고개가 내려왔다. 제 손등을 덮고 팔을 따라 느릿하게 내려온 뜨끈한 손바닥은 느슨한 티셔츠 소매까지 기어들어 어깨의 맨살을 살살 주물렀다. 느리고 뜨겁게 연한 입안 표피를 문지르고 쓸어 올리는 입맞춤이 이어질수록 숨이 얕아졌다.
어느새 담요를 파고든 큼지막한 손길은 티셔츠 밑단 아래로 들어가 잭의 긴장한 복근을 살살 주물렀다. 두툼한 목덜미를 잡아 내린 잭이 그의 팔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작은 웃음을 흘리자 맞닿은 입술로 그가 미소를 짓는 게 느껴졌다. 어느샌가 한 손으로 가슴 근육을 전부 덮어 마사지하는 손길에서는 저녁 내내 온 몸을 오르내리던 뜨거운 정욕보다는 평소 그에게서 느껴지는 다정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절정을 쫓는 쾌락 없이도 그저 서로의 온기를 온전히 느끼는 따스한 충만감이 심장 안쪽부터 쿵쿵대며 부풀어 올랐다.
온전히 저를 향하는 리바이의 어둑한 눈동자에 가득한, 그가 가진 사랑의 깊은 감정이 몽롱한 의식을 넘어와 머릿속을 휘저었다. 죄를 고하듯 눈물을 흘리며 사랑의 조각만을 간신히 고백하던 불안한 모습과 눌러 내리지 않은 끈적한 욕망을 모두 드러내며 으르렁대던 난폭한 모습이 이리저리 뒤섞여 눈앞을 일렁였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외면 아래로 당장이라도 제 목덜미를 물어 뜯을 듯 맹수같이 이를 드러내는 욕망을 가진 리바이가 저를 완전히 믿고 목줄을 내어주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척추를 따라 날카로운 전율이 타고 올랐다.
평생 그와 함께한다면 이렇게 매 순간 심장이 가득 차도록 행복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이 호숫가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노을이 지고 있을 터였다. 온화하고 따스한 눈동자로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보는, 지금의 자신보다 나이를 더 먹은 리바이의 느슨한 미소가 눈에 선했다. 지금처럼 뜨겁지 않을지는 몰라도 지금보다 한참 더 깊고 단단하게 자라난,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자신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꾹 감긴 눈꺼풀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 나도 리바이를 사랑하고 있구나.
이미 자신도 알고 있었을 그 당연한 진심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프게 꾹 조여들었다. 산산조각이 난 심장으로는 평생 되찾지 못 하리라 생각했던 사랑의 열망은 어느새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워 손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이렇게나 사랑한 건 생전 두 번째로 있는 일이었다. 지난 사랑이 지나간 자리로 얼마나 많은 공허와 우울함이 제 영혼을 잠식했던가. 의식 뒤편에서 기어오른, 오래 묵은 상처에서 솟아난 날 선 불안감과 공포는 온 몸으로 리바이의 애정을 받아들이던 잭의 심장을 뒤틀었다.
맞닿은 혓바닥 위로 흘러든 떨리는 날숨에 리바이는 고개를 조금 들어 이마를 마주했다. 침묵하며 제 뺨을 감싼 다정한 손길은 욱신거리며 젖어 든 제 눈꼬리를 살살 닦았다.
사랑해, 리바이. 당신과 함께 이 호숫가에서 평생 살고 싶어.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짧고 무거운 진심은 자꾸만 목구멍에 걸려 제대로 된 단어조차 만들지 못했다.
결국 아무런 말도 전하지 못한 잭은 볼품없이 흐느끼며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그저 제 뒤통수와 허리를 더욱 단단히 당겨 안으며 조용히 젖은 숨을 삼킨 리바이는 몇번이고 그의 진심을 귓가에 속삭였다.
“I love you, Jack. I’m yours forever. No matter what happens, I’m yours, baby…” (사랑해요, 잭. 저는 평생 당신 거에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난 당신 거에요…)
차가운 새벽빛이 들기 시작한 오두막에서 눈을 뜬 잭은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며 저를 단단히 감싼 채 깊은 잠에 빠져든 리바이의 풀어진 얼굴을 구석구석 응시했다.
밤 늦게까지 집요할 정도로 제게 물을 권하던 리바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어든 갈증에 목이 텁텁했다. 몸을 조금 꾸물거리기 무섭게 리바이의 눈꺼풀이 묵직하게 끔뻑였다.
“Hm, mm? Need something, Jack?” (흠, 응? 뭐 필요해요, 잭?)
“Just some water.” (물 좀 마시려구요.)
“I can… I can bring it for you.” (제가…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여전히 눈을 감은 리바이는 한껏 잠긴 목으로 제대로 된 목소리도 내지 못하면서도 잭을 다시 제 품으로 당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바르작거렸다.
“Shh. I’m fine. Lay down and close your eyes. It won’t take long.” (쉬. 괜찮아요. 누워서 눈 감고 있어요. 오래 안 걸릴테니까.)
“But…” (하지만…)
“Be good, Levi. Lay down.” (착하게 굴어야죠, 리바이. 누워요.)
“Hm. Yes, sir.”
금방이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리바이는 그의 어깨를 조금 세게 잡아 내린 잭이 이마에 입술을 꾹 붙이며 명령하듯 속삭이자 그제야 몸에 힘을 빼며 배시시 웃었다. 그대로 다시 베개에 머리를 붙인 그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두 발을 내리고 힘을 주자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순간 강해진 이질적인 복통에 잭의 미간이 구겨졌다. 저녁에 먹었던 진통제를 조금 더 먹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젊은 연인의 사랑을 지나치게 받은 탓에 진통제까지 먹어야 하다니. 복에 겨운 일이군.
굵직한 모양대로 제 뱃속에 길을 내고 들어와 들쑤셨던 단단한 열기를 떠올리자 괜히 뺨에 열이 올랐다. 벌써 제 등 뒤에 있는 그의 뜨끈한 품이 절실했다. 내일 아침에 앓는 소리라도 내면 그가 얼마나 미안해할지 상상하자 심장 깊은 곳부터 간지러운 웃음이 방울방울 솟아 올라 입꼬리를 올렸다.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선 잭은 조심스럽게 어두운 오두막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서랍 어디선가 약통을 꺼냈던 리바이를 생각하며 어두운 주방의 서랍을 열어 더듬거리던 잭은 약통 대신 손끝에 걸리는 얇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
애석하게도, 밤눈이 밝은 잭이 그 어두운 실내에서도 제 손에 들린 게 무엇인지 알아 차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SD카드와 저급 가십거리를 다루는 잡지사 기자의 명함.
그 순간 눈앞이 아찔하게 멀어졌다. 캐비넷에 기대 선 잭은 입을 틀어 막아 거친 숨소리를 간신히 막았다.
아니, 아냐, 아닐 거야. 리바이는…
자신의 추궁에 당황해 눈썹을 늘어뜨린 그가 이 수상한 물건들의 정체에 대해 설명해주는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지나치게 쉬웠다. 친구, 아는 사람, 아버지의 지인, 우연히 받은 명함과 그저 운 없이 같이 보관하고 있던 메모리카드… 리바이가 이걸 가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해명은 무한했다.
그래, 아니겠지. 설마. 분명히 무슨 다른 이유가…
벽을 짚은 채 덜덜 떨리는 걸음을 옮기던 잭은 침대 발치에서 그대로 멈추어 섰다. 여전히 평화롭게 잠에 빠져있는 리바이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리바이가 기자와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 지금까지 모두 제 환심을 끌기 위한 거짓 애인 놀음이었노라 실토한다면? 만약_—_
— 우주까지 같이 나간 약혼자를 배신해놓고는 지구로 돌아와 끝까지 거짓말이나 했으면서, 누군가 당신 같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줄 거라고 생각하다니 우습군요. 뭐, 나한테는 고마운 일이지만 말이죠, 사령관님.
항상 자신을 향하며 다정한 애정과 뜨거운 욕망으로 가득했던 리바이의 시선에 냉소와 경멸만 남아 차갑게 식은 걸 상상하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며 구역감이 치밀었다.
입을 단단히 틀어막은 채 간신히 오두막 밖으로 조용하게 빠져나온 잭은 보트 하우스에 다다라서야 다리가 풀려 엎어진 채 헛구역질을 해댔다. 물 말고는 더 나올게 없는데도 자꾸만 내장이 조여드는 통에 지난 몇 분간 그를 괴롭히던 복통이 극심하게 날뛰었다. 역한 위액을 토해내고 나서도 뱃속을 들쑤시는 통증은 가라앉을 기세를 보이지 않았으나,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난 잭은 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엔진 소리가 리바이를 깨웠을지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잭은 무작정 호수 반대편을 향해 보트를 몰았다. 제 오두막까지 돌아오는 그 몇 분이 평생 같이 길게 느껴졌다.
리바이와의 모든 추억을 와르르 무너뜨리며 그의 작은 행동이나 말 한마디까지 조각조각 잘라내 집요하게 확인하려는 머릿속에서 열이 올라 끔찍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쾅쾅 두드렸다.
지금 자신이 리바이를 오해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오두막 어디에도 메모리 카드를 읽을 수 있는 전자기기가 없었으나, 이 명함의 주인이 리바이와 무슨 관계인지, 같이 보관되어있던 메모리 카드가 그와 관계가 있는지 따위를 직접 듣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리바이에게 돌아가 잠시나마 그의 사랑을 의심해서 미안하다 말하며 제 이기적인 불신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면, 다정한 그는 제 불완전한 마음마저 감싸줄게 분명했다.
본인을 믿지 않고 아무런 말 없이 침실을 뜬 자신에게 그의 어둑한 소유욕이 이를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잭은 그가 자신에게 줄 모든 걸 감사하게 받아들일 다짐을 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발치에 납작하게 엎드려 그를 믿지 않은 멍청한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벌해달라 빌 준비까지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정말 그가 자신을 속였던 게 사실이라면…
부두에 대충 보트를 매어 놓으면서도 잭의 몸과 마음은 성한 곳이 없었다. 그저 당장 이 끔찍하게 차가운 새벽이 끝나고 리바이의 따스한 품에 안겨 새로운 호수의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부여잡은 채 오두막으로 향한 잭은 지체 없이 위성 전화가 거치된 곳으로 향했으나, 정작 전화기를 집어 들자 폭풍우처럼 그의 몸을 뒤덮은 불안감과 공포심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소파에 한껏 웅크려 앉아 애써 심호흡을 하면서도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제대로 누르는 데만 몇 분이 걸렸고, 통화 버튼을 누르는 데 또 몇 분이 걸렸다.
기도하듯 전화기를 두 손에 간절하게 잡고 이마에 붙인 잭은 평생 찾지도 않았던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이른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수신음이 채 세 번을 울리기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Hello? Who is this?” (여보세요? 누굽니까?)
퉁명스럽게 갈라지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약한 잡음과 섞여 수화기를 넘었다.
떨리는 숨을 애써 진정시키며 대답을 하려던 잭은 그제야 당사자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리바이 케인을 알고 있는지, 어째서 그가 본인의 명함을 가지고 있는지 물으면 제대로 된 대답이나 들을 수 있을까? 정말 리바이와 모종의 계약을 한 기자라면 그에 대해 묻는 순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발을 뺀 다음 리바이에게 연락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망할 잭 하퍼에 대한 기삿거리 정도는 직접 줄 테니 리바이에 대해 아는 대로 전부 알려달라고 하는 게 맞을까? 이런 잡지사와 일하는 기자를 어떻게 믿고? 리바이가 이 사람과 정말 아무런 관련도, 접점도 없다면?
어지럽기만 한 생각을 따라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눈을 꾹 감은 채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숨을 죽인 잭은 자꾸만 목구멍을 기어 오르는 역한 기운을 삼키며 식은땀에 젖은 눈꺼풀을 짓눌렀다.
이대로는 무슨 말을 해도 원하는 걸 얻기 어렵겠지. 지금 당장은 전화를 끊고, 약이라도 먹고 난 후에…
“Wait, is this about Jack Harper?” (잠깐, 혹시 잭 하퍼 관련된 일입니까?)
방금 전보다 훨씬 호전적으로 변한 사내의 목소리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잭의 목을 조였다. 바들거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그는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든 눈꺼풀만 끔뻑였다.
“Look, buddy. I’m sure you’ve been checking. I did my end of the deal, so keep your words. I just need—” (이봐요. 확인 하고 계신거 압니다. 내가 할 일은 했으니까, 그쪽이 하겠다는 일도 해주셔야죠. 제가 필요한 건—)
그대로 전화를 끊은 잭은 전원까지 꺼버린 전화기를 오두막 어딘가로 던지고 나서야 주방 개수대로 달려가 또 다시 결실 없는 헛구역질과 잔기침을 뱉어냈다.
리바이. 리바이 케인. 당신 도데체 뭐 하는 사람이야? 왜 나야? 왜 하필이면 지금 날 찾아와서—__
몇 시간 전까지 저를 품에 단단히 안은 채 사랑을 속삭이던 그의 다정한 손길과 목소리의 온기는 여전히 생생하게 피부 위를 간질였다. 지난 며칠간의 기억들이 하나둘 기어올라 심장을 난도질했다.
처음부터 그가 보여준 맹목적인 호의와 믿음을 너무 쉽게 믿은 게 잘못이었다.
세상 사람들 전부가 사령관 잭 하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를 수가 없으니, 어딜 가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그 지겨운 손가락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뿐이지 않은가. 누군가는 자신의 본 모습을 좋아해 주리라는 허상에 빠져 스스로를 속인 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리 쉽게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게 당연하다고 단정 지어 버리다니.
비카를 죽음으로 내몰고 줄리아까지 돌아서게 만든 너 같은 인간을 누군가 정말 믿어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도시에서는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다니는 주제에, 누군가는 별 볼 일 없는 너라도 진심으로 사랑해줄 거라고 기대라도 했어?
꿈 깨, 잭 하퍼. 현실을 보라고.
제 마음속 어둑한 곳에서 기어오른 끈적한 자기혐오는 날카로운 질책을 토해냈다.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잃은 잭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마음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만 쏟아냈다.
남은 여생을 리바이와 이 호숫가에서 보낼 거라 생각하며 되찾은 사랑의 열기에 취해 있던 꿈같은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짓된 사랑이라도 좋으니, 조금만 더 길게 그의 품에 안겨 행복할 수 있었더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고백하지도 못한 사랑에 고통 받지 않았을 텐데…
심장을 옥죄이는 서늘한 불안감에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리바이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산만한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제대로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불안한 기분을 느끼며 기상을 한 건 지나치게 오랜만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차갑게 식은 침대를 더듬거리던 리바이는 아침 해가 조금 들기 시작한 쌀쌀한 오두막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잭에게 제 모든 걸 쏟아낸 뜨거운 정사의 순간과 그가 제 품에 안겨 조용히 밤의 호수를 감상하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 꿈은 아니었는데…
제 팔뚝 가득 죽죽 긁힌 잭의 손톱자국을 덧그리자 따가운 열기가 멍한 의식을 긁었다. 어깨며 등짝을 뜨겁게 달구는 흔적도 비슷한 모양새일 테니, 꿈을 꾼 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침대를 비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 그가 물을 마시러 간다고 했던 것도 같은데, 작은 오두막 내부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젖은 수건으로 구석구석 닦아 주었던 그의 몸을 생각하면 아침 운동을 하러 나갔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아침의 호수를 보기 위해 잠시 오두막을 나섰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스멀스멀 심장을 기어오르는 최악의 생각을 애써 떨치며 침대에서 일어선 리바이는 브리프만 입은 채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문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한결같이 자신을 믿어준 잭의 애정 가득한 손길을 떠올린 리바이는 그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단단한 믿음을 재차 틀어 잡았다.
문을 열고 나가면 언제나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지은 잭이 자신을 맞이해줄 터였다. 오늘 아침은 호수가 아름답네요, 같은 말을 해주지 않을까.
갈비뼈 안쪽을 요란하게 두드려대는 심장 때문에 문고리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난 뒤에야 리바이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문을 활짝 열고 오두막을 나섰다.
순간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그가 보였던 것도 같았는데, 눈을 두어번 깜빡이니 그저 텅 빈 호숫가만 시야에 가득했다.
목구멍까지 울컥 들어찬 불안감에 숨을 쉬기 어려웠다.
문고리를 틀어 잡은 채 문가에 얼어 붙어있던 리바이는 문득 호수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잭의 오두막 앞 부둣가에서 잔잔한 호수의 물결에 흔들리고 있는 건 분명 자신의 보트였다. 그리고 그 부둣가의 끝에는…
— Levi Kane. (리바이 케인.)
언제나 리바이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잭의 무전은 리바이의 심장을 바닥없는 심연으로 난폭하게 끌어내렸다.
덜덜 떨리는 숨을 삼키며 급히 오두막 안으로 돌아온 리바이는 무전기를 찾아 들고서 호숫가로 뛰어갔다.
“Jack? What’s… What’s going on? Why–” (잭? 무슨… 무슨 일이에요? 왜–)
— You’re really good. I’ll give you that. (참 대단하시네요. 그거 하난 인정해 드리죠.)
목덜미에 한기가 서리도록 가라앉은 차가운 목소리가 리바이의 숨통을 죄었다.
지금 자신에게 무전을 보내고 있는 잭은 잠이 들기 직전까지 제 품에 안겨 애정 가득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던 잭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무언가 잘못 된 게 분명했으나 그는 리바이가 대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무전을 이었다.
— An SD card and a reporter’s business card. I know how this goes, unfortunately. (SD카드랑 기자 명함. 이게 어떤식으로 굴러가는지는 잘 알고 있거든요. 불행하게도 말이죠.)
그제서야 리바이는 자신이 그제껏 잭에게서 숨기고 있던, 같이 방문했던 마을에서 획득한 기자의 명함과 메모리 카드를 기억해냈다.
아찔하게 멀어지는 눈앞에 휘청이던 그는 얕아진 숨을 헐떡이며 쓸어올린 머리카락을 틀어 잡았다.
리바이가 처음부터 잭에게서 그 모든 걸 숨기려 마음 먹었던 건 아니었다.
끈질기게 잭의 뒤를 밟으며 음침하게 사진을 찍던 기자를 찾아낸 리바이는 이전에 몇 번 일한 적이 있는 민간 군수 회사를 들먹이며 잭에 대해 함구한다면 다른 사진들은 나중에 보내주겠노라 약속하고는 그의 사진기에 들어있던 메모리카드와 명함을 가져갔다. 곧장 잭에게 돌아가 그 모든 걸 알려주려 했으나, 혼자서 자신을 기다리던 그는 이미 끔찍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감정이 불안하게 날뛰는 그를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에 리바이는 입을 다물었고, 결국 그날은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하지 못한 채 오두막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 기자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그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알려주는 게 옳은 일이었으나, 리바이는 제 곁에서 평화를 되찾은 그의 마음에 괜히 지난 상처를 들쑤시는 돌을 던져 잭이 다시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내일, 다음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출국하기 전에…
잭이 자신의 곁에서는 매 순간 행복하기만 바랐던 제 이기적인 욕심에 휘둘려 그의 알 권리를 무시했던 잘못된 선택이 결국 돌고 돌아 자신이 그 기자와 한통속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거였다.
잭이 그동안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어주었다 하더라도, 그가 겪었던 모든 일을 생각하면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향한 진심을 믿지 못한 잭이 자신의 해명조차 듣지도 않은 채 곁을 떠났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을 믿고 마음을 열어주었던 그가 또 다른 불신의 상처를 입었으리라는 사실에 속이 비틀렸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호수를 넘어간 그가 온기 없는 오두막에서 홀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심장이 그대로 뜯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를 품에 안고 모두 제 잘못이라 말하며 그의 용서를 빌고 싶었으나, 호숫가 반대편에 갇힌 리바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잭이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 … And, by the way, he said he kept his part of the deal, whatever that means. I hope you got what you fucking wanted. (… 그리고, 참고로 말이죠, 그 사람이 자기 할 일은 했다는군요. 그게 무슨 뜻이든 말이에요. 당신이 원했던 걸 얻었다면 좋겠군요.)
길어진 침묵을 깬 잭은 그 마지막 무전을 끝으로 무전기의 배터리를 분리해 바닥에 힘없이 떨어뜨렸다. 그대로 지체 없이 돌아선 그는 헬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No, Jack… JACK! NO, PLEASE! I, I’M SORRY! JACK!” (안돼, 잭… 잭! 안돼, 제발! 내가, 내가 미안해요! 잭!)
무전기를 집어 던지고 호숫가로 걸어 들어가 미친 듯 소리를 질러도 헬기에 올라탄 잭은 제 방향으로 눈길 한 번 돌려주지 않았다.
눈동자 뒤를 푹푹 찌르는 두통과 심장을 난도질하는 통증에 무릎까지 일렁이는 물 속에서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목구멍을 치고 오른 구역감을 삼키며 거칠게 눈을 몇번이고 닦아내도 자꾸만 꾸역꾸역 밀려 오른 눈물에 조그마한 잭의 모습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당장 그를 멈춰 세우고 제대로 된 사실을 알리지 못하면 평생 그를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더 이상 그들 사이에는 그 어떤 통신 장비도 존재하지 않았다.
호수 반대편에서 제게 눈길 조차 주지 않는 잭이 헬기를 이륙 시키기 전까지 리바이가 자신의 결백을 알려줄 방도는 없었다.
저 망할 기계가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게 완전히 망가트리는 게 아니라면.
지나치게 고조된 감정에 몽롱해진 리바이의 이성은 급한 걸음으로 오두막으로 발길을 옮기는 몸을 그저 따를 뿐이었다.
눈물에 젖어 축축한 눈을 깜빡인 리바이는 어느새 제 손에 들린 탄창을 사냥용 장총에 밀어 넣고 볼트를 당기고 있었다.
묵직하게 철컥이며 장전된 소총의 차가운 움직임이 평생을 함께한 본능을 긁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는 호수 너머 보트하우스 위에 자리 잡은 헬기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대로 장총을 제 어깨에 바짝 견착한 리바이는 숨을 느리게 내쉬며 총구를 올렸다.
스코프 너머로 호수 반대편이 깨끗하게 보였다.
민간용 헬기의 큼지막한 창문 너머로 드러난 조종석.
분주하게 계기판을 오르내리는 손길.
어느새 힘차게 돌기 시작한 헬기의 날개.
조종간을 단단히 잡은 잭은 잠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계기판을 박살 낸다면 저 헬기가 두 번 다시 하늘로 떠오르는 일은 없겠지.
잭이 다시는 날 떠나지 못할 거야.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 조용한 초여름의 아침이었다.
그제서야 문득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의 어둑한 눈동자는 차마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상처로 가득했다.
산을 넘은 아침 햇살이 호수의 표면에 반사되어 스코프 너머 리바이의 시신경을 날카롭게 찔렀다.
급히 숨을 들이쉬며 거칠게 총구를 내린 리바이는 다시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길로 탄창을 풀어 바닥에 떨어트리는 동시에 볼트를 당겨 약실을 거칠게 비웠다.
저주같은 고철 덩어리를 바닥에 집어 던진 그는 오두막의 창문을 강하게 닫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호수 너머의 새하얀 헬기가 불안하게 떠올라 빠르게 고도를 높이는 게 닫힌 창문 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보였다.
차마 삼키지 못한 울음은 뜨거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호숫가에서 멀어진 헬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리바이는 몇시간이고 텅 빈 하늘을 응시하며 꿈같이 아름다웠던 잭과의 모든 추억을 떠올렸다.
어제 노을이 호수에서 잭과 함께 맞이하는 마지막 노을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 더 오래 그의 손을 잡고 아름다운 그를 응시했을 텐데…
이제는 혼자만의 추억으로 남을, 호수의 붉은 노을 빛이 일렁이는 잭의 미소가 눈앞을 스치며 이미 너덜너덜해진 심장을 다시 한번 미어지게 만들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정상적이었다면, 조금이라도 그와 어울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잭이 이리 쉽게 자신을 떠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자꾸만 못난 감정이 기어올라 내장을 비틀었다.
그러나 생각이 닿는 모든 걸 짓밟고 이리저리 휘날리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리바이는 애초에 제게 어울리지 않는 이를 감히 마음 깊은 곳까지 담은 제 잘못이라는 걸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제 인생에 빛이 되어준 잭의 다정한 애정을 받으며 짧은 시간이나마 그를 제 품에 안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는 분에 겨운 행운이었다.
축축한 눈매를 거칠게 닦아내며 젖은 숨을 터뜨린 리바이는 제 발치에서 위험하게 번뜩이는 총탄을 응시했다. 며칠간 자취를 감추었던 끔찍한 피비린내의 악몽이 목구멍을 긁었다.
눈부시게 밝은 잭의 애정에 눈이 멀어 제 내면의 괴물이 얼마나 끔찍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비틀린 소유욕에 휘둘려 헬기에 올라탄 그에게 총구를 겨눴던 순간을 떠올리자 묵직한 구역감이 혀뿌리를 자극했다. 텅 빈 위장을 쥐어짜는 역한 기운을 억지로 삼키자 또 다시 눈매가 뜨겁게 젖어 들었다.
잭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에 못내 마음이 아팠으나, 이런 못난 마무리를 통해서라도 그가 제 욕심 가득한 손길 사이로 안전히 빠져나간 게 천만다행이었다.
잘못된 오해 때문에 잭이 너무 오래 고통받지 않기를.
그의 남은 인생에는 화사한 그에게 어울리는 행복한 날만 가득하기를…
잭의 미소를 떠올리며 몇번이고 진심을 가득 담은 기도를 올린 리바이는 창문 너머로 오후의 해가 들기 시작하고 나서야 여전히 어두운 오두막의 더 깊은 곳으로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호숫가는 행복한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이 지나가는 나무들의 평화로운 노래가 가득했다. 호수가 가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여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잭도 자신도,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추억만이 남은 호숫가를 떠나 진정 서로가 속하는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번편... 다음편... 그 다음편... 조금 슬플 예정일 것 같아요 🙇♂️ 그렇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끓이고 있습니다!!
이번 편도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
